박근혜 전 대통령이 4년 반 전 지하경제 양성화로 임기 동안 복지재원 27조 원을 마련하겠다고 했을 때 현오석 당시 경제부총리는 귀를 의심했다. 해마다 숨은 세금을 5조, 6조 원씩 찾아낸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국세청 당국자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탈세자가 새로 나오기 마련”이라는 논리로 안심시켰지만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였다.
“증세 부담 근로자에게 전가”
문재인 정부는 고소득자와 기업에 대한 증세를 복지재원 조달 수단으로 내세웠다. 전임 정부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은 덕분일 것이다. 기득권층이라는 낙인이 찍힌 고소득자에 대한 증세는 그대로 추진되겠지만 법인세 인상은 일사천리로 처리할 일이 아니다. 전체 경제를 위축시키는 문제여서다. 이것이 대기업 옹호 논리라는 색안경을 낀 사람에게 다음 글은 어떻게 읽히는가.
‘법인세 부담 증가는 경제 성장에 부정적이다. 반면 법인세 경감이 소득세 등 여타 세목보다 성장에 효과적이다. 법인세 부담은 기업뿐 아니라 근로자와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조세(인하) 경쟁이 심화하는 국제 추세에 대응해 효과적인 기업과세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법인세 인상에 대한 전경련의 반대논리 같겠지만 2006년 초 재정경제부가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한 중장기 조세개혁방안의 한 대목이다. 노무현 정부는 이 분석에 따라 준조세성 부담금을 줄이는 등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려고 했다. 노 정부가 친기업적이었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기업에 실질적인 개혁의 성과물을 안겼기 때문이다.
새 정부가 법인세율을 높인다면 경쟁국들이 세금을 내리면서 기업을 유인하는 글로벌 흐름까지 감안했던 노 정부의 정책기조를 거스르는 게 된다. 어느 기업이나 최소한의 세금을 내도록 강제한 최저한세제도를 노 정부는 축소해야 한다고 봤으나 문재인 정부는 거꾸로 최저한세율을 인상할 예정이다. 정책은 바뀔 수 있다. 그래도 노 정부의 계승자를 자임하는 정권이 핵심 기업정책을 뒤집으려면 합리적인 근거를 대야 한다. 이명박 정부의 법인세 인하가 효과를 내지 못한 만큼 원상 복구해야 한다는 논리에는 정치적 문책만 있고 비전이 없다.
최순실 게이트를 지켜보면서 기업에 대한 반감이 커진 국민이 적지 않지만 법인세는 기업에 국한된 세금이 아니다. 세 부담의 4분의 1 정도는 가격 인상과 신규 고용 위축의 형태로 소비자와 근로자에게 넘어온다.
이런 핵심 현안에 칼자루를 쥔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정책위의장은 법인세 인상을 서두르지 않겠다고 하면서 올 세법 개정 때 포함될 가능성을 배제하지도 않았다. 방향만 정해지면 세율을 조정하는 건 두 달이 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인의 이런 생각 때문에 우리 세법이 누더기다. 정부와 여당이 ‘복지정책은 쾌락을 안겨주지만 세금은 고통만 안겨준다’는 정치판의 공리주의에 안주해 상황을 즐기려 한다면 국민이 보내는 박수소리는 작아질 것이다.
조세개혁 논의 당장 해야
노무현 정부는 흡연억제세를 신설하려 했으나 공론화 도중 보류했다. 박근혜 정부가 국민건강 증진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담뱃값을 올리고도 욕을 먹는 건 소통단계를 건너뛰어서다.
문재인 정부가 공약 이행 시 구멍 난 분야를 메우는 데 법인세를 당겨쓰기로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세율 인상을 발표한다면 권위주의 정부와 다를 게 없다. 세금은 쉽게 꺼내 쓸 수 있는 쌈짓돈이 아니다. 당장 세제 개혁 공청회를 열라. 법인세든, 부가가치세든 증세의 타깃은 이념을 배제한 끝장토론으로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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