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6월마다 전국 300여 개 공공기관들은 초긴장 모드가 된다. 기획재정부가 매기는 공공기관 경영평가 성적표가 나오기 때문이다. 공공기관들은 경영평가 결과로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6단계(S, A, B, C, D, E)로 나뉘는 성적에 따라 성과급 지급 여부와 함께 기관장 해임 여부까지 판가름 난다. 한 공기업 임원은 “대한민국 공공기관의 존재 목적은 경영평가 점수를 잘 받는 것 그 자체다. 본연의 업무를 잘하고 흑자를 내는 것은 다음 문제”라고까지 말했다.
공공기관 경영평가는 돈 잘 벌고 노사관계 좋다고 높은 점수를 받는 간단한 지표가 아니다. 올해 기준으로 평가 문제지(공공기관 경영평가편람)만 959쪽에 달하는 복잡다단한 고차방정식이다. 주무부처인 기재부는 공공기관 경영평가를 ‘공기업·준정부기관의 자율·책임경영 확립을 위해 경영 노력과 성과를 평가하는 제도’라고 정의하고 있다. 수많고 다양한 경영평가 항목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문은 정부 권장정책 이행 여부다. 쉽게 말하면 정부가 시키는 대로 했느냐는 뜻이다. 이를 통해 자율경영을 유도한다는 논리는 언뜻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처럼 보이지만 현재 규정은 그렇다.
이에 따라 공공기관은 구조적으로 정부 말을 잘 들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부 지시를 잘 따라야 월급도 더 받고 기관장이나 임원들의 자리 보전도 가능하다. 정부로서는 정책을 추진하는 데 이만한 우군이 없다. 대통령과 경제부총리의 말 한마디, 부처의 공문 한 장에 국내총생산(GDP)의 40%, 고용 25만여 명을 책임지는 공공기관들이 일사불란하게 착착 움직이는 비결도 여기에 있다.
이 지점에서 정부가 가끔 잘못된 유혹에 빠진다. 민간 분야를 설득하고 개혁하느라 고생하느니 말 잘 듣는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정책을 밀어붙여 단기간에 성과를 내고 싶다는 생각이다. 이 과정에서 자주 ‘민간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마중물’이라는 그럴듯한 수식어도 붙는다. 정부가 선의(善意)로 추진하는 정책인 만큼 일단 공공기관에 적용해 성과가 나면 민간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는 논리다.
문재인 정부의 ‘공공 일자리 81만 개 정책’도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공공 채용으로 마중물을 부어줌으로써 ‘소비 활성화→기업 투자 확대→민간 채용’의 선순환이 작동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를 위해 공공기관 평가지침만 바꾸고, 누가 잘 이행했는지 평가만 하면 되니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다.
안타깝게도 정부가 이런 식으로 추진한 ‘마중물 정책’들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이명박 정부의 고졸 채용이 대표적이다. 당시 정부는 “공공에서 고졸 채용 분위기가 확산되면 학력 인플레도 사라지고 민간 고졸 채용도 늘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극소수의 고졸자에게 공공·금융기관행(行) 로또 쥐여주기에 머물렀다. 박근혜 정부도 경력 단절 여성을 위해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추진했지만 민간에선 철저히 외면당했다. 사회보험료 지원 등 고용에 따른 각종 부담은 그대로 두고 근로시간만 절반으로 줄이니 기업이 따를 수가 없었다. 육아휴직 정착, 금요 조기퇴근제 등도 공공기관 밖으로 좀처럼 퍼지지 못했다.
더 안타까운 점은 이런 ‘마중물 정책’이 계속될수록 공공과 민간의 일자리 질 격차만 벌어졌다는 것이다. 철밥통을 깨겠다며 최소한의 수준으로 추진했던 성과연봉제와 성과평가제는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공공은 문자 그대로 ‘신의 직장’이 될 상황에 놓인 셈이다. 그럴싸하지만 실속은 없는 ‘마중물 정책’에 대한 환상은 이제 버려야 한다. 양질의 민간 일자리는 기업 하기 좋은 환경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공공이 나선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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