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 어부인 정건목 씨의 동생 정향 씨(56·여)는 “편지만 생각하면 원하는 게 돈인 건지, 괜히 오빠가 다치는 건 아닌지 미칠 지경”이라며 답답해했다. 편지가 와서 되레 화가 치밀었다.
7년 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30대 초반의 탈북 여성이 접근해 “오빠와 직접 통화시켜주겠다”며 300만 원을 가져갔다. “돈이 어디를 넘어가고 있다”며 띄엄띄엄 연락이 오다가 ‘김정은 정권으로 바뀌면서 단속이 심해졌다’며 소식이 끊겼다.
지난해 초 정건목 씨의 편지를 건네받아 남측 가족에게 전달한 최성룡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이사장은 “가족들을 데리고 함께 중국 단둥(丹東)으로 오라. 건목 씨를 데리고 나오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최 이사장은 “과거부터 북한 보위성이나 북측 사람들이 이산가족과 납북자들의 아픔을 이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라고 설명했다. 가족들을 꾀어 돈을 요구하고 중간자 역할을 한 사람들을 납치하거나 위해를 가하는 식이다.
심리적인 트라우마에 탈북 브로커 사기까지
상봉의 후유증을 겪는 것은 비단 정건목 씨 가족만이 아니다. 감시 아래 이뤄지는 짧은 만남, 다시 기약할 수 없는 만남에 이산가족들은 두 번 울고 있다. 대한적십자사가 당시 상봉 이후 이산가족 41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24%가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낀다’고 답했다. 불면증, 무력감, 그리움, 우울증 등 심리적인 트라우마를 호소했다.
동아일보는 2015년 10월 20∼22일, 24∼26일 이뤄진 마지막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 애틋한 사연으로 시선이 집중됐던 이산가족들을 인터뷰해 상봉 이후의 삶을 추적해 봤다.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북측 최고령 할아버지 리흥종 씨(90)가 ‘꿈꾸는 백마강’을 나직하게 부르자 딸 이정숙 할머니(70)는 정말 아이처럼 울었다. 그리고 상봉 이후 두 달 동안 이 할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지난해 6월 아버지를 그리던 이 할머니에게 북-중 무역을 한다는 사업가가 아버지에게 돈을 전달할 수 있다며 접근했다. “방에 TV가 없다”는 아버지 말이 귀에 맴돌던 이 할머니는 돈을 보내려고 했다. 2000달러면 아버지가 방 세 칸짜리 집도 살 수 있는 돈이라고 했다. 그 대신 아버지 사진을 보내달라고 요구하자 브로커는 답이 없었다. 이 할머니는 “상봉 끝나고 금전이든, 서신이든 당사자끼리 직접 교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엉뚱한 사람들이 돈을 벌고 있다”며 다시 흐느꼈다.
2년 전 이산가족 상봉 당시 구상연 할아버지는 98세로 남측 최고령 상봉자였다. 65년 만에 주름진 할머니가 된 두 딸 송자 씨와 선옥 씨를 만났다. 구 할아버지는 이산가족 상봉을 하고서 석 달 뒤 돌아가셨다. 아들 형서 씨는 “오직 그날만 기다리신 것 같았다”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남은 가족들은 다시 생이별을 한 북측 누나들을 위해 차곡차곡 돈을 모으고 있으나 전달할 방법이 없다.
65년 만에 재회한 신혼부부였던 오인세(85), 이순규 씨(86·여)의 아들 장균 씨는 이산가족 상봉 이후 7개월 동안 술에 의존할 정도로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한참 혼났다”고 했다.
장균 씨는 평생 처음 본 아버지 어깨를 주물렀다가 살이 없이 갈비뼈만 앙상한 마른 몸매에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는 또 들쭉술을 곁들인 식사를 하면서 허겁지겁 비우고는 머쓱해했다. 그런데도 팔 힘이 어찌나 센지 당해낼 수가 없었다. “팔 힘이 왜 이리 좋아요”라고 물었더니 “일만 했다”고 속삭였다. 그런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장균 씨는 가슴이 메어졌다. 어머니 역시 “보고 싶긴 뭘 보고 싶냐”라고 하셨지만 돌아와서는 내내 시름시름 앓았다.
“얼마나 아버지를 그리워했겠습니까. ‘아버지’ 불러봤으니 좋았죠. 그런데 만나고 나니 불쌍하고 가여운 모습이 잊혀지지를 않아 여태껏 속만 상합니다.”
누나 윤금순 씨(83)를 만난 희표 씨(81)는 남북이 단절된 채 살아온 세월이 만든 간극이 컸다고 회고했다. 희표 씨는 “누나의 막내며느리가 ‘미국 놈들이 빨리 나가야 우리가 통일된다’ 그러기에 ‘미국이 손바닥만 한 나라에 왜 있겠느냐. 통일되면 붙잡아도 나갈 거다’라고 했더니 눈을 흘겼다”며 “이후 북측 가족의 말수가 줄어들면서 변변한 대화를 못 나눴다”고 했다. 희표 씨는 “명절마다 돼지고기 서너 근씩 준다”고 자랑하는 누나 손을 꼭 잡고 “죽지만 말고 살아 있어라. 데리러 올게”라고 한 후 돌아섰다.
북한 당국의 엄격한 통제 아래 ‘보여주기식 만남’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철저한 북한 당국의 감시 아래 이뤄진다. 한 번 이산가족 상봉을 했던 가족들은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부터 든다고 한다.
“이산가족 테이블 위에는 담뱃갑만 한 녹음기가 올려져 있고, 테이블 주변에는 감시요원들이 배치돼 있었다. 화장실을 가도, 담배를 피우러 가도 따라다녔다. 2시간의 만남이 끝나면 매가 병아리 채 가듯 아버지를 데려갔다. 그리 핍박받고 사나 싶어 한동안 술만 들이켰다.”(장균 씨)
“대화도 하고 밥도 편하게 먹는 줄 알았다. 막상 가 보니 잠도 같이 못 자고, 대화도 1, 2시간씩 쪼개져 있고…. 감시원들이 지켜보다가 깊은 얘기를 할 때마다 눈빛을 보냈다. 요즘에는 이산가족 만나봤자 마음만 더 아플 것이라고 말린다.”(희표 씨)
누나 박룡순 씨(85)를 상봉한 용득 씨(83)도 이산가족 상봉 방식에 대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개방된 장소에서 감시를 당하고 있으니 누나는 눈치를 보며 눈물만 흘리고 용득 씨도 대화를 길게 할수록 추궁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니 말이 절로 조심스러워졌다고 했다.
“북한이 바뀌지 않는데 자주 만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편지 왕래를 하더라도 모두 검열할 텐데 안부밖에 더 묻겠나. 이산가족 상봉할 때만이라도 같이 잠도 자고, 감시 없이 자유롭게 대화하면 이렇게 가슴에 맺히지는 않을 것이다.”(장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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