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내로남불’ 공방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24일 03시 00분


[토요판 커버스토리]내·로·남·불


《“야당의 주장은 내가 부동산을 사면 투자요 남이 사면 투기이며, 내 여자관계는 로맨스고 남의 여자관계는 스캔들이라는 논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1996년 6월 12일 국회 본회의장. 의사진행발언에 나선 신한국당 박희태 의원은 야당 의원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국회 파행의 책임을 두고 여야가 공방을 벌이던 중이었다.

먼저 불을 지른 건 새정치국민회의 장영달 의원이었다. 그는 “여당 의원들은 청와대로부터 짓눌린 노예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쏘아붙였다. 이에 박 의원은 당시 원외인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를 겨냥해 “(야당은) 장외 지도자에 의해 조종되는 리모컨 국회를 끝내라”고 맞불을 놓았다. 그러면서 내놓은 논리가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었다. 20여 년 뒤 한국 정치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인 내로남불은 그렇게 시작됐다.

9년여 만의 정권교체로 공수(攻守)가 뒤바뀐 여야는 과거 서로의 언어를 그대로 답습하며 ‘웃픈’(웃기면서 슬픈) 데칼코마니 정국을 연출하고 있다. 여당이 “(야당의) ‘반대를 위한 반대’는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라고 공격하면 야당은 “여당이 야당일 때는 더했다. 어디서 내로남불이냐”고 쏘아붙이는 식이다.

야당의 속성을 잘 아는 여당, 여당의 한계를 이해하는 야당…. 역지사지하면 ‘환상의 협치’를 이룰 만도 한데, 그들은 까마귀 고기를 먹은 듯 오늘도 ‘나만 옳다’는 이중 잣대로 내로남불을 외치고 있다.》

▼서로 거울 보듯… 여야 바뀌면 태도 반전 ‘정치적 한국病’▼


“빵 한 조각, 닭 한 마리에 얽힌 사연이 다 다르듯 관련 사실에 대한 내용 또한 들여다보면 성격이 아주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의 ‘5대 인사 배제 원칙’ 위배 논란이 확산되자 지난달 26일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내놓은 해명이다. 집권 뒤 막상 인선을 해 보니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야권에서는 곧바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9년여 만에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정치권은 온통 ‘내로남불 공방’에 휩싸여 있다. 내로남불은 올해의 ‘사자성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최근 유행어가 됐지만 사실 정치권의 고질적 현상이다. 똑같은 퍼주기를 해도 내가 하면 ‘민생정책’이고, 남이 하면 ‘포퓰리즘’이다. 다른 정당과 공동보조를 맞춰도 내가 하면 ‘협치’고, 남이 하면 ‘야합’이다. 그럼에도 새 정부가 출범하자 여야가 불과 몇 달 전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면서 국민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 몇 달 새 180도 표변한 여야

새 정부가 내각 진용을 갖추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놓고 뒤바뀐 여야의 태도는 내로남불의 전형이다. 야권이 공직 후보자의 자질보다 신상 검증에 주력한다며 여권이 인사청문회 제도를 뜯어고치겠다고 나선 것부터가 꼭 닮았다.

문 대통령은 13일 야권의 ‘부적격’ 판정을 받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며 “현재 인사청문회가 흠집내기 식으로 하니 정말 좋은 분들이 청문회 과정이 싫다는 이유로 고사한 분들이 많다”며 “그런 것 때문에 더 폭넓은 인사를 하는 데 장애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바른정당은 “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 흠집내기와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던 야당 시절을 돌아보면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비판했다.

시계를 4년 반 전으로 돌려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신분이던 2013년 1월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의 자진 사퇴 등 인사 난맥상이 불거지자 “인재를 뽑아서 써야 하는데 인사청문회 과정이 신상털기 식으로 간다면 과연 누가 나서겠느냐”고 했다. 당시 민주통합당(현 민주당)은 “현 인사청문회는 김대중 정부가 여소야대 상황에서 도입했고, 이 제도로 장상, 장대환 총리 후보자가 낙마했다”면서 “그런 청문회를 지적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공세를 폈다.

박근혜 정부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도 인사청문회 제도 개선을 주장했다. 하지만 민주당이 ‘야당의 무대’인 청문회 제도를 고치는 데 협조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민주당이 최근 야3당에 인사청문회 제도 개선을 위한 소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야당들이 시큰둥한 건 당연한 일이다. 누가 누구를 탓하겠는가. 한마디로 ‘업보’인 셈이다.

정치적 위기를 맞으면 대국민 여론전을 펼치며 야당을 압박하는 것도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의 장기이기도 했다. 지난해 1월 경제활성화법 통과가 지연되자 “국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못 하니까 국민들이 나서서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 아니냐”며 대통령이 국민 서명운동에 동참하는 정치적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1년 반 뒤 청와대 주인은 바뀌었지만 발언 내용은 쏙 빼닮았다. 문 대통령은 15일 인사 대치 정국의 발단이 된 강경화 외교부 장관 임명을 강행하며 ‘국민’을 앞세웠다. 문 대통령은 “(야당이) 대통령이 그를 임명하면 협치는 없다거나 장외투쟁까지 말하며 압박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면서 “최종 판단은 국민의 몫이다. 저는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 야당도 국민의 판단을 존중해 달라”고 말했다. 집권 초반 국민의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사실상 ‘여의도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는 대목이었다.

○ “국회 무시”라는 野, “국정 발목잡기”라는 與

내로남불은 자생력 잃은 한국 정치의 토양에서 자란 독버섯이다. 여당은 청와대를 ‘묻지마 엄호’하고, 야당은 청와대를 ‘묻지마 반대’해야 하는 숙명에 갇힌 그들이 자신의 과거 행적을 깡그리 잊지 않는다면 ‘정치 분열증’을 앓게 될지 모른다. ‘집단적 기억상실증’은 생존을 위한 방어기제인 셈이다.

여야 4당 원내대표는 20일부터 인사 대치 정국으로 ‘올스톱’된 국회를 정상화하기 위해 물밑 접촉을 이어갔다. 하지만 합의문 작성을 눈앞에 두고 한국당이 추가경정예산안 처리를 문제 삼아 판을 깼다. 한국당 김선동 원내수석부대표는 “민주당 우원식 원내대표가 ‘추경을 확보하라’는 (청와대의) 오더를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우 원내대표는 “입이 닳도록 전화하고 문턱이 닳도록 야당을 찾아갔는데 너무하다”며 울컥했다.

19대 국회의 ‘데자뷔’ 아닌가. 지난해 초 여야는 박 전 대통령이 주문한 기업활력제고특별법(원샷법)과 노동개혁법 처리를 놓고 줄다리기를 벌였다. 야당인 민주당은 이들 법안과 선거구 획정의 연계처리를 요구하며 여야 원내대표 간 잠정 합의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당시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는 “스토커 소리를 들으며 쫓아다닌 게 몇 달인데 (야당이) 합의를 깨기만 반복하는 것은 후안무치한 행태”라며 울분을 토했다.

여당일 땐 야권의 공세는 ‘국정 발목잡기’다. 야당일 땐 여권의 정면 돌파가 ‘국회 무시’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이 싸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는 강 장관 임명 강행에 “인사청문회를 그저 흠집내기, 시간낭비로 여기는 국회 무시이자 독재”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민주당 송영길 의원은 “의원내각제라면 국회 해산권을 발동해야 할 상황”이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나만이 옳다’는 독선이자 아집이며 국회 무시다.”

“(야당이 무작정 반대한 뒤)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하게 함으로써 대통령을 흠집 내려는 의도다.”

이건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의 반대에도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임명을 강행할 때 내놓은 여야의 반응이다. 화자(話者)만 바뀌었지 내용은 한결같다. 화자를 가리면 누가 한 얘기인지 모르게 된 지 오래다.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에 앞서 한국 정치에는 여당과 야당만 있을 뿐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 집단적 기억상실 속에 무한 도돌이표

야당의 반대로 국정 동력을 잃은 정부의 선택지도 매번 다르지 않다. 국회를 우회하는 꼼수를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최근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법안 개정이 아닌 시행령이나 고시 개정을 통해 정책을 추진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 서둘러 정책 성과를 내려면 어차피 ‘되지도 않을’ 야당 설득에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는 논리다.

하지만 민주당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6월 ‘법 위의 시행령’을 손보겠다며 국회법 개정을 시도했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현 민주당) 강기정 정책위의장은 “그동안 시행령에 너무 많은 권한을 위임한 탓에 정부의 재량권이 너무 넓어졌다”고 지적했다. ‘유승민 찍어내기’로 귀결된 국회법 파동은 사실 정부의 ‘국회 우회’ 꼼수에 현 여당이 제동을 걸려고 하면서 촉발했다.

전문가들은 두 차례 정권교체에도 여야가 똑같은 정치 행태를 무한 반복하는 것은 대통령과 의회 권력 간 ‘견제와 균형’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정치학)는 “국회의원이 저마다의 소신에 따라 의정 활동을 하기보다 정파의 이익에 매여 있다 보니 여당은 정권을 옹호하고, 야당은 정권을 반대하는 행태를 답습하게 된다”며 “이런 고질적인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내로남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말했다.

‘여당의 양보냐, 야당의 협조냐’는 닭과 달걀 중 어느 것이 먼저냐는 논쟁처럼 무의미할지 모른다. 문제는 10년 주기의 정권교체가 정치권의 역지사지와 협치 역량을 키우기보다 내로남불의 철판만 두껍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지금 정치권에 가장 중요한 덕목은 염치(廉恥·부끄러움을 아는 마음)라는 말이 나온다.

홍수영 gaea@donga.com·박성진 기자
#내로남불#문재인 정부#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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