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6일 독일 쾨르버 재단 초청 연설에서 밝힌 ‘베를린 구상’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포괄적으로 타결하기 위한 대북 정책의 로드맵이다. 북한 붕괴나 흡수통일을 배제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김정은 정권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항구적 평화 체제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베를린 선언’을 발표한 곳에서 문 대통령은 연설과 질의응답을 통해 임기 동안 추진할 대북 정책의 전 과정을 소상하게 밝혔다. 문 대통령이 취임 후 공개적인 자리에서 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질문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핵·미사일 동결이 시작, 평화협정이 끝’
문 대통령은 최근 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을 거론하며 “북한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지 않기 바란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어 “북한은 핵과 미사일 개발을 포기하고 국제사회와 협력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도발을 중단하고, 핵·미사일을 동결하라는 압박이다. 이는 문 대통령이 생각하는 ‘베를린 구상’의 첫 단계다.
핵 동결, 군비 통제 등 단계적인 절차를 거쳐 대화를 통해 평화협정과 비핵화를 이뤄냄으로써 한반도에서의 전쟁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겠다는 것이 이날 ‘베를린 구상’의 핵심이다. 문 대통령은 “종전과 함께 관련국이 참여하는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며 “북핵 문제와 평화 체제에 대한 포괄적 접근으로 완전한 비핵화와 함께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관련국이 참여하는 평화협정’은 북한이 주장해 온 ‘북-미 평화협정’과는 다르다는 게 청와대 설명이다. 한국이 주도권을 쥐되 미중일러가 모두 참여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것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핵·미사일 동결이 입구라면, 한반도 평화협정과 비핵화는 출구”라며 “문 대통령이 임기 내 추진할 대북 정책의 전체 구상을 밝힌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험을 제거하는 것 외에 북한의 체제 붕괴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도 재확인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는 어떤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진하지 않을 것이고, 인위적인 통일을 추구하지도 않을 것”이라며 “나와 우리 정부가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평화”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일단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휴전협정 64주년인 7월 27일을 기해 남북이 군사분계선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지하자고 제안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발표한 ‘베를린 구상’에 대해 “통일을 이룩한 위대한 국민인 독일 국민들 앞에서 북한을 향해 절실한 제안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북한의 호응이 관건
그러나 ‘베를린 구상’의 결정적 조건은 북한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느냐 여부다. 북한이 지금과 같은 도발을 이어간다면 문 대통령의 구상은 시작 단계에서부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북한에 대해 “해야 한다면 막강한 군사력을 사용할 것”이라며 강도 높은 대북 제재와 압박 의지를 밝히고 있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와 엇박자가 날 수도 있다.
당초 연설문 초안에는 북핵에 대한 원론적 언급만 담겼지만 북한이 전격적으로 ICBM 시험발사를 감행하면서 북한을 질타하는 내용의 수위가 한층 높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은 “북한이 핵 도발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더욱 강한 제재와 압박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도 문 대통령은 “대화의 장으로 나오는 것도, 어렵게 마련된 대화의 기회를 걷어차는 것도 오직 북한이 선택할 일”이라고 압박했다. 문 대통령은 ‘지금이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냐’는 질문에 “강도 높은 제재 압박의 궁극적 목표는 북핵 폐기를 논의하기 위한 협상 테이블로 (북한을) 끌어내는 것”이라고 답했다.
○ “이번 추석에 이산가족 성묘”
북한에 대한 압박 속에서도 문 대통령은 이산가족 성묘를 위한 남북 적십자회담 개최를 제안했다. 대화 국면 조성을 위해 민간 교류부터 물꼬를 트겠다는 뜻이다.
문 대통령은 “북한 이산가족의 고향 방문이나 성묘를 허용하고 개방하겠다”며 “‘10·4 남북공동선언’ 10주년이자 추석인 이날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개최하자”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북측 이산가족이 성묘를 위해 고향을 찾는다면 자연스럽게 많은 국민이 남북 교류 활성화를 체감할 수 있게 된다”며 “보안 문제는 경찰, 국가정보원 인력을 활용하면 되고 각 지방자치단체도 적극 협조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2015년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 제안했던 ‘한반도 신경제 지도’를 재차 꺼내 들었다. 목포·여수·인천과 개성, 해주를 잇는 서해축과 부산과 나진·선봉을 잇는 동해축을 중심으로 남북 경제공동체를 꾸려가겠다는 구상이다. 문 대통령은 “끊겼던 남북 철도는 다시 이어질 것”이라며 “남-북-러 가스관 연결 등 동북아 협력사업들도 추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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