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 재판]발언 주체도 없이 단어 위주 나열… 안종범 자신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영화관에서 가장 실망스러울 때가 ‘예고편만 화려했네’라는 생각이 들 때다. 4일과 5일부터 6일 오전 1시경까지 연이어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공판이 그랬다. 최근 3개월에 걸쳐 40번 가까이 열린 이 부회장의 공판 중 하이라이트로 꼽힐 만했다.
4일 공판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증인 출석을 거부한 상태에서 안종범 전 대통령정책조정수석비서관이 증인으로 나왔다. 이날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이른바 ‘안종범 수첩’ 실물을 공개할 것으로 알려져 서울중앙지법 서관 510호 소법정에는 이전 재판보다 4배 많은 방청객과 취재진이 몰렸다. 좌석은 꽉 찼고 서 있을 공간조차 모자라 재판정 문을 닫지 못할 정도였다.
이날 공개된 안 전 수석의 얇은 수첩 63권은 올 초부터 특검이 박 전 대통령의 삼성 뇌물 수수 혐의를 뒷받침하는 핵심 증거라고 주장해 온 것이다. 4일 안 전 수석 증인신문 직전까지 특검 측은 “수첩의 신빙성은 오늘 신문 과정에서 확인될 것”이라며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독대 당시 대화 내용을 입증하는 데 이 수첩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법정에서 베일을 벗은 수첩 내용은 특검의 예고에 턱없이 못 미쳤다.
안 전 수석이 일주일에 한 권씩 썼다는 수첩에는 주로 박 전 대통령과 통화를 하면서 급하게 받아 적은 단어들이 나열돼 있었다. 대화 형태의 문장이 아니라서 정작 수첩 주인조차 그 의미에 대해 “모르겠다”거나 “그냥 (대통령이) 말씀하신 걸 기재한 것”이라고 답한 경우가 많았다. “2016년 6월 12일자 수첩에 ‘은산분리’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는 특검 측 설명에 안 전 수석은 웃으며 “저보다 잘 보시는 것 같네요”라고 말했다.
수첩 속 단어들이 누가 누구에게 한 말인지 불분명한 점도 문제였다. 뇌물죄는 대가성 입증이 핵심이기 때문에 ‘혜택’으로 간주할 수 있는 단어를 누가 언급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예컨대 지난해 2월 15일 수첩에는 ‘금융지주회사’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이에 대해 재판부가 “금융지주 이야기는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사이에 누가 말한 것인지는 모른다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안 전 수석은 “그렇습니다. 이런 내용의 대화가 있었다는 것만 (대통령이) 불러주셨습니다”라고 답했다.
또 안 전 수석은 5일 공판에서 삼성 측 변호인에게서 “박 전 대통령이 삼성 승계 작업을 모니터링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내 기억엔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4월 7일 시작된 이 부회장 재판은 오늘로 딱 3개월을 맞는다.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재판에 대해 요즘 많은 사람이 “정권이 바뀐 게 영향을 미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이런 의혹을 불식시키는 게 예고편만 못했던 영화 본편의 그나마 의미 있는 엔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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