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동아/8월30일]1972 남북적십자회담 첫 개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30일 16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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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적십자회담의 평양 개최 소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1972년 8월 30일자 1면.
남북적십자회담의 평양 개최 소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1972년 8월 30일자 1면.

“남북으로 흩어진 이산가족을 찾기 위한 남북적십자의 첫 본회담이 30일 오전 10시 평양 대동강 동편 대동강교 바로 옆에 자리 잡은 대동강 문화회관에서 역사적인 막을 올려 앞으로의 본회담진행원칙에 관한 남북간의 합의문서를 채택했다.”(동아일보 1972년 8월 30일자 1면)

분단 사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남북대화였다. 앞서 1971년 8월 12일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남북통일이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기 어려운 현실 하에서 적어도 1000만 이산가족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소식을 전해주며 재회를 알선하는 가족 찾기 운동만이라도 우선 전개하자”고 북한에 제의했다. 그해 8월 14일 북측이 평양방송으로 이를 수락하면서 남북적십자회담이 성사됐다.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제1차 본회담을 앞두고 평양으로 향하는 대한적십자사 대표단 일행.  동아일보DB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제1차 본회담을 앞두고 평양으로 향하는 대한적십자사 대표단 일행. 동아일보DB

본회담에 이르기까지 예비회담이 25차례나 열렸다. 무엇보다 본회의 의제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한적에서 이산가족의 생사 및 소재확인, 재회 알선 및 상호방문 등을 제안한 데 대해 북적은 친척과 친우까지 포함해야 하고 자유왕래도 실현시켜야 한다고 주장해서다. 그러나 ‘친우의 자유왕래’는 적십자활동의 정치적 중립에 위반될 수 있는 것이었기에 논란이 일었다. 이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제6차부터 제20차 예비회담까지 8개월에 달하는 15차의 공식회담을 거쳐야 했다. 1972년 6월 16일 제20차 예비회담에 이르러서야 △남북 이산가족과 친척들의 주소 및 생사 확인 △자유로운 방문과 상봉 △자유로운 서신 왕래 △자유의사에 대한 재결합 △기타 인도적으로 해결할 문제 등 5개 항목을 본회담 의제로 확정지었다.

1972년 8월 30일 평양에서 제1차 본회담이 열린 이래 서울과 평양에서 7차례에 걸쳐 본회담이 개최됐다. 남북대화가 물꼬를 트면서 회담 초반은 축제 분위기였지만, 차츰 갈등이 불거지면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1973년 7월 13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7차 본회담 뒤 8월 28일 북한이 전면적인 대화 중단을 선언하면서 이산가족 찾기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이후 회담 재개의 노력은 꾸준하게 이뤄졌지만, 적은 규모나마 이산가족의 고향 방문이 이뤄진 건 1985년에 이르러서였다. 그해 5월 제8차 본회담에서 8·15광복 40주년을 전후해 이산가족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어 9월 20~23일 남북적십자사 총재가 각기 151명의 방문단과 함께 서울과 평양을 방문했다.

그 뒤로도 남북 접촉은 계속됐지만 상호간 이견을 좁히지 못해 큰 성과는 없는 상태다. 정부는 지난달 17일 추석을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행사 등을 논의하기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북한에 제의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남북이 갈라진 하늘 아래에서 헤어져 살아가는 이들이 자유롭게 만날 날은 언제쯤 올까.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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