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0월 9일은 동남아·대양주 순방을 떠난 전두환 당시 대통령(86)이 첫 방문지였던 버마(현 미얀마)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전 대통령 일행은 이날 오전 버마 수도 랑군(현 양곤)에 있는 ‘버마의 국부(國父)’ 아웅산 장군(1915~47)의 묘지를 참배할 예정이었다. 위 사진은 정부 각료들이 아웅산 묘지에서 대통령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장면이다.
안타깝게도 이 사진은 이들이 이승에 남긴 마지막 사진이 됐다. 이 사진을 찍고 나서 바로 몇 초 후 북한에서 설치한 폭탄이 터졌기 때문이다. 맨 앞줄에 자리 잡은 8명 중 맨 왼쪽에 있는 이기백 당시 합동참모의장, 그리고 사진 뒤쪽 맨 왼편에 보이는 최재욱 청와대 공보 비서관 등 두 명 만 목숨을 건졌고 나머지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
북한에서 원래 노렸던 ‘타깃’은 물론 전 대통령이었다. 원래 전 대통령은 이날 10시 30분에 이 묘지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차량 정체로 도착이 늦어지면서 대통령 부부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전 전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 북한 테러범들이 폭탄을 터뜨린 이유는 뭐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아웅산 묘지에 제일 먼저 도착한 이계철 당시 주 미얀마 한국 대사가 전 대통령과 비슷한 헤어스타일(?)이었던 걸 이유로 꼽는 이들이 많다. 안경까지 써 전 전 대통령과 더욱 비슷해 보이는 이 대사가 태극기가 펄럭이는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자 버마 나팔수가 진혼곡(‘애국가’였다는 의견도 있다) 연주를 시작했고, 북한에선 이 나팔 소리를 테러 기점으로 잡았기 때문에 폭탄을 먼저 터뜨렸다는 것이다.
함병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도착한 걸 보고 북한 공작원들이 전 대통령이 도착한 것으로 착각했다는 의견도 있다. 보통 비서실장은 대통령과 함께 움직이는데다 함 실장 역시 전 대통령과 헤어스타일(?)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이 설(說) 역시 버마 나팔수가 먼저 착각했고 북한에서 나팔 소리를 기점으로 폭탄을 터뜨린 것으로 설명한다.
이 자리에서는 동아일보 사진부 소속이던 이중현 기자도 순직했다. 이 기자는 당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취재차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에 파견 갔다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풀(pool) 기자’로 대통령을 따라 나섰다가 변을 당했다.
동아일보는 사건 발생 사흘 후인 그달 12일자 지면을 통해 이 기자가 생전에 찍었던 사진을 간추려 소개했다. 그러면서 “폭발 마지막 순간까지 사진을 찍다 산화한 고 이 기자의 마지막 작품은 카메라가 부서져 싣지 못해 안타깝다”고 밝혔다. 이 기자는 출국 전 카메라 렌즈를 새 걸로 바꾸면서 “가장 깊이 있는 사진을 찍어 오겠다”고 주변에 말했지만 끝내 사진을 세상에 선보이지 못했다.
1983년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현재 동아일보 기자들 역시 이 기자의 얼굴을 알고 있다. 지금도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 14층 동아일보 편집국에는 다른 순직 기자 두 명과 함께 이 기자의 사진이 걸려 있어서다.
맨 위 사진 촬영 당시 앞줄에 서 있던 사람 중에서 합참의장이던 이기백 대장만 살아남은 건 그가 장교 정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육군사관학교에 전시 중인 이 옷에 붙어 있는 각종 금속제 휘장, 약장이 방탄복 구실을 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 이 사건 때 중상을 입은 이 대장을 긴급 후송한 인물이 훗날 특전사령관을 지내는 전인범 당시 중위(예비역 육군 중장)였다. 전 전 특전사령관은 올해 2월 ‘문재인 캠프’ 합류하려다 “우리 집사람이 비리가 있었다면 권총으로 쏴 죽였을 겁니다”라는 발언에 끝내 발목이 잡혔던 인물이기도 하다.
심상우 의원은 국회의원으로는 유일하게 이 테러 때 목숨을 잃었다. 심 의원은 당시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자격으로 전 대통령과 동행했다. 민정당 총재가 바로 전 대통령이었다. 심 의원은 방송인 심현섭 씨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호남(광주) 출신인 심 씨가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돕는 등 보수적인 정치색을 드러냈던 게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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