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 청산의 근본 해법으로 개헌이 거론되지만 여야의 논의 수준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머물고 있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는 1월부터 30여 차례 회의를 열었지만 ‘내년 2월 개헌안 마련, 5월 본회의 처리’라는 대원칙에만 합의했을 뿐 진전된 안을 내놓지 못했다.
정치권 개헌 논의의 핵심은 권력구조(정부형태) 부분이다.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하고 견제장치를 마련하자는 데 공감대가 있다. 하지만 여야 간 셈법이 달라 논의가 공전되고 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정부형태 분과 자문위원)는 “정부형태에 대한 타협이 이뤄진다면 개헌 논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인데 여야가 서로 양보하지 않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현재 정부형태 분과 자문위원 11명 중 6명은 혼합정부제를, 2명은 대통령 4년 중임제를, 2명은 의원내각제를 지지한다. 1명은 절충안을 찾자는 입장에 가깝다. 개헌 논의가 공전하자 노무현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이상수 변호사는 27일 전체회의에서 “정부형태 등 합의가 어려운 쟁점에 대한 자문 기구로 ‘공론화위원회’를 도입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각 당의 원내 사정도 녹록지 않다. 무엇보다 개헌안을 먼저 공개해 개헌의 불씨를 댕기는 정당이 없다. 정계 개편이나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개헌이 가져올 득실을 저울질하느라 먼저 나서기가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9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더불어민주당이 대통령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개헌안에 찬성할 가능성도 점점 작아지고 있다. 민주당은 개헌특위 논의 과정에서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표현을 넣는 데도 반대했다. 자유한국당은 헌법 전문에 포함할 역사적 사건에 대한 여론조사 항목으로 ‘촛불시위’가 거론되자 강력히 반발했다. 현행 소선거구제에서 여러 지역구를 하나의 선거구로 묶는 중·대선거구제로 바꾸자는 선거구제 얘기까지 나오면 개헌 논의는 블랙홀에 갇힐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여야 간 논의에서 공감대가 모인 것은 헌법 29조 2항의 ‘이중배상금지 조항’을 삭제하자는 정도다. 군인이나 군무원, 경찰의 직무 집행 시 발생한 손해에 대해 법률이 정하는 보상 외에 국가를 상대로 한 배상 청구를 금지하는 조항을 삭제하자는 것이다.
여권 일각에서는 권력구조 부분을 제외하고 지방분권이나 기본권 등 다른 항목에 대한 개헌안이라도 우선 도출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문제점이 노출된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손질 없이 지방분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본질을 흐리는 얘기”(개헌특위 소속 한국당 정종섭 의원)라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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