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이전에는 서울에서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초가집 몇 채뿐인 한적한 농촌 지역이었던 곳, 하지만 휴전회담으로 세계적 관심이 쏠렸고 정전협정 체결로 민족 분단의 상징이자 남북 만남의 역사적 현장이라는 ‘두 얼굴’을 갖게 된 곳, 바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Joint Security Area)이다.
최근 한 북한군의 목숨 건 귀순 사건은 JSA가 살벌하고 삼엄한 남북 대치의 최전선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눈 깜짝할 사이의 위기가 무력 충돌과 확전으로 비화될 수 있는 한반도의 ‘화약고’, 그것이 JSA의 민낯이다.
높이 15cm, 폭 50cm의 콘크리트 경계석(군사분계선·MDL)이 남북을 가르는 JSA는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냉전 현장이기도 하다. 전쟁도 평화도 유보된 채 한반도 정전체제의 ‘심장부’인 JSA의 시간은 ‘1953년 7월 27일’(정전협정 체결일)에 멈춰 있는 것이다.
JSA는 휴전 직후인 1953년 10월 유엔사와 공산 진영 사이에 군사정전위원회 운영을 위해 MDL 중간에 설정됐다. 동서 800m, 남북 400m 타원형 지대다. 서울에서 북서쪽으로 62km, 평양에서 남쪽으로 215km 떨어져 있다. 10km만 더 올라가면 개성이다.
JSA에는 20여 개 건물이 들어서 있다. MDL에는 좌우로 7개의 조립식 막사가 자리 잡고 있다. 그 뒤로 남측에 자유의집과 평화의집이, 북측에는 판문각과 통일각이 있다. 1971년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을 계기로 JSA는 남북 공식·비공식 접촉 및 회담, 왕래 통로로 활용되기도 했지만….
현재 공동경비구역(JSA) 내 남북 접촉은 완전히 단절됐다. 1991년 유엔사가 한국군 장성을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로 임명하자 북한은 정전회의 자체를 거부했다. 북한은 통지문을 주고받는 전화와 팩스도 일절 받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유엔사는 이번 귀순사건에서 드러난 북한군의 정전협정 위반 항의를 군사분계선(MDL) 앞에서 확성기로 북에 통보해야 했다.
JSA 내 핵심 기구인 중립국감독위원회(중감위)도 20년이 넘도록 파행 운영되고 있다. 중감위는 정전협정 체결 때 유엔이 추천한 스웨덴과 스위스, 공산 진영이 추천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등 4개국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북한이 체코 대표단(1993년)과 폴란드 대표단(1995년)을 추방한 뒤 스웨덴과 스위스 대표단만 활동하고 있다. 스위스와 스웨덴은 각 소장 1명과 영관급 장교 5명을 2년 주기로 중감위 대표단으로 파견한다. 이들은 주로 판문점 사무실에서 업무를 본다. 주중에는 판문점 숙소에서 잠을 잘 때도 많다. 중감위 대표단은 과거 포로송환 감시가 주임무였지만 지금은 MDL 감시와 남북 소통창구, 방문객 영접 등을 맡고 있다. 매주 화요일 오전 회의 이후 중감위 보고서를 북한군 우편함에 넣는다. 그러나 북한은 1995년 이후 무반응이다. 중감위 대표단은 이를 ‘메아리 없는 외침’이라고 부른다.
○ 도끼 만행부터 북한군 귀순까지…
과거 JSA 내에는 남북을 가르는 MDL이 따로 없었다.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과 북한군이 뒤섞여 근무하면서 대화하거나 물건을 주고받기도 했다. 40여 년 전 JSA 대원으로 근무한 이모 씨(60)는 “북한군이 양주와 롤렉스 시계를 들고 다니며 귀순을 유혹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북조선이 지상낙원이다’ ‘넘어오면 잘 먹고 잘살게 해주겠다’면서 공작 활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1976년 8월 18일 ‘도끼만행 사건’으로 모든 게 바뀌었다. 당시 15m 높이의 미루나무(25년생)가 북한군 초소를 가려 감시가 어려워지자 유엔사의 미군 경비중대장 아서 조지 보니파스 대위와 소대장 마크 토머스 배럿 중위 등 11명이 가지 절단 작업에 나섰다. 이를 지켜보던 북한군 박철 중위 등 15명이 중지를 요구했지만 작업이 계속되자 북한군 20여 명이 몰려왔다. 이들은 몽둥이와 작업에 사용한 도끼를 뺏어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 중위를 살해했다. 다른 8명의 대원도 중경상을 입었다.
미국은 항모전단과 B-52, F-111 폭격기 20여 대를 한반도에 집결시킨 뒤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폴 버니언’ 작전으로 반격했다. 대북방어태세(Defcon·데프콘)도 2단계로 격상해 대북 전면전도 불사할 태세였다. 작전 후 북한은 김일성 명의로 사과했고, 유엔사는 JSA 내 MDL을 그어 남북을 엄격히 분리했다. JSA 경비대대의 부대 명칭도 ‘캠프 키티호크’에서 보니파스 대위를 기리기 위해 ‘캠프 보니파스’로 바꿨다. 정전협정 때 포로를 교환한 ‘돌아오지 않는 다리’도 이때 폐쇄됐다. 북한은 이를 대체하기 위해 ‘72시간 다리’를 세웠다.
이후 남북 간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대치와 상호 감시가 시작됐지만 1984년 11월 23일 또다시 총격 사건이 터졌다. JSA 북측 지역에 있던 소련인 관광객이 돌연 MDL을 넘어 남측 자유의 집으로 달려온 것이다. 이를 뒤쫓아 북한군들도 MDL을 넘어와 양측 간 교전이 벌어졌다. 북한군 3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했다. 유엔군 소속 장명기 상병이 전사했다. 유엔사는 매년 이날이 되면 장 상병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이 밖에도 북한군은 1990년대 초 MDL을 고의로 침범하거나 인근 대성동 마을 주민을 납치하는 등 지속적으로 도발을 했다. 북한군의 JSA 귀순 첫 사례로는 1998년 2월 변용관 상위(중위와 대위 사이·판문점 경비장교)가 있다. 2007년 9월에도 북한군 병사 1명이 JSA로 귀순했다.
○ ‘최전선에서(In front of them all)’
JSA에서 남북 경비병력은 지척의 거리에서 1년 365일 24시간 ‘총성 없는 교전’을 하고 있다. 한국군 JSA 경비대대 장병들은 회담장 건물 주위에 꼿꼿이 서서 북한군 감시와 방문객 경호 임무를 수행한다. 몸의 절반은 건물로 가리고, 까만 선글라스를 착용해 시선 방향도 북한군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철칙이다. 북한의 도발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JSA 대원들은 임무 때 항상 방탄조끼를 착용하고 장교와 병사 모두 실탄이 장전된 K-5 권총을 휴대한다. 코앞의 적과 언제든지 총격전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총 250여 km의 MDL에서 철책 없이 북한군을 직접 보면서 대치하는 부대는 JSA 경비대대가 유일하다. 그래서 부대 슬로건도 ‘최전선에서(In front of them all)’다. JSA 대원 출신인 김모 씨(28)는 “북한 경비대원이 ‘미제앞잡이’ ‘간나××’ 등 욕설을 외치면서 우리 측 대원에게 도발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주한미군이 맡아 온 JSA 경비 임무는 2004년 한국군으로 넘어왔다. 그해 7월 한국군 JSA 경비대대가 창설됐다. JSA 경비대대는 10% 정도의 미군을 포함해 수백 명 규모다. JSA는 유엔군 관할이다. JSA 경비대대도 유엔군사령관의 지휘 통제를 받는다.
JSA 경비대원에게는 누구보다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이 요구된다. 장교와 병사 모두 선발된 최정예 전투요원이다. 육군 상위 1% 수준의 전투력과 건전한 국가관을 갖춰야 한다. JSA 대원들은 어떤 위기상황도 ‘5분 내 종료’를 목표로 삼고 있다. 유사시 ‘60초’ 안에 투입되는 JSA 외곽 초소의 기동타격대는 잘 때도 전투복과 전투화를 벗을 수 없다.
고강도 훈련도 끊임없이 반복한다. 특히 적과의 총격전에 대비해 개인과 팀, 중대 단위로 실전 같은 고난도 전투사격 훈련에 주력한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일발필중(一發必中)’의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JSA 내 초소와 회담장 등에서 적과의 교전에 대비한 근접건물전투사격(CQB) 연습도 JSA 대원들만 받는 특수훈련이다.
JSA 대원들의 전체 훈련 중 사격훈련 비중은 50%를 넘는다. 일반 보병부대의 연 사격훈련량의 3∼4배나 된다. 군 관계자는 “북측 경비병력이 출신성분이 좋고 전투력도 뛰어난 ‘에이스’라는 점을 잘 알기에 JSA 대원들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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