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0월 ‘선박 간 이전’ 방식으로 정유제품을 실은 과정은 첩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우리 정부는 이번에 적발된 선박 외에 10여 척의 외국 선박과 북한 선박 간의 연결고리를 조사하고 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불법 정유제품 이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교부와 관세청 등에 따르면 홍콩 선적 ‘라이트하우스 윈모어호’는 10월 11일 여수항에서 일본산 정유제품 1만4039t을 적재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선박 화물관리인 등이 능숙하게 관련 서류를 작성하고 적재 과정도 숙지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 선박은 같은 달 19일 동중국해 공해상에서 북한 선박 ‘삼정2호’ 등 4척의 배와 접선했다. 윈모어호가 파이프를 통해 삼정2호에 정유제품 600t을 이전하는 데 걸린 시간은 3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국제사회의 제재가 강화되자 북한이 4월 자동차 한 대당 휘발유 주유를 회당 20L로 제한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번 삼정2호가 가져간 정유제품 600t은 한꺼번에 자동차 약 3만 대에 주유할 수 있는 분량이다.
윈모어호에는 중국인 23명 등 25명의 선원이 승선해 있었다. 배와 함께 선원들을 억류한 정부는 이들을 상대로 경위를 조사한 뒤 출국 조치할 예정이다. 선박 화물관리인은 우리 정부 조사에서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했지만 삼정2호의 사진을 보여주며 추궁하자 북한 선박과 만난 사실 등은 일부 인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접선 경위 등을 놓고선 여전히 진술이 오락가락한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우리 정부는 10월 윈모어호가 북한 선박과 접선한 사실을 인지한 뒤 이 배를 집중 감시 대상 선박으로 올려놨다. 윈모어호가 북한 선박과 접선하는 장면은 미국 국무부 등과 대북 관련 ‘정보 공유’ 대상을 확대한 덕분에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게 당국자의 설명이다. 미 측이 정찰 자산을 통해 확인된 이민트(IMINT·영상 정보)를 우리 정부에 넘겨줬다는 것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9월 채택된 대북제재 결의 2375호를 통해 대북 정유제품 공급량을 기존의 450만 배럴에서 200만 배럴로 제한했다. 또 최근 대북제재 결의 2397호를 통해서는 이를 50만 배럴로 줄였다. 외교 소식통은 “미국을 중심으로 이제 안보리가 대북제재 시선을 넓히겠다는 경종을 울린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이번 적발은 북한이 그동안 국제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우회 경로를 그만큼 확보했다는 방증이란 평가도 나온다. 실제 북한은 밀수 우회로 확보에 최근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밀수 경로도 중동, 아프리카 등 제재의 시선이 미치지 못한 곳으로 넓어졌다는 게 외교가의 분석이다.
한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8일(현지 시간)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현행범으로 딱 걸렸다. 중국이 북한에 석유가 계속 흘러들어 가게 허용해 매우 실망스럽다”고 밝혔다. 적시하지 않았지만 윈모어호 적발 사실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도 “석유가 북한으로 들어가는 걸 안다. 오늘 아침 폭스뉴스 보도를 봤다”며 “(중국이) 북한 문제에 도움을 준다면 (미중 무역관계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 보겠지만, 돕지 않는다면 내가 항상 하겠다고 말해 왔던 걸 실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29일 정례 브리핑에서 중국이 석유 밀무역을 방치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날 유엔 안보리는 불법 화물을 실어 나른 ‘례성강1’ ‘삼정2’ ‘을지봉6’ ‘릉라2’ 등 북한 선박 4척의 국제 항구 접근을 금지하는 제재 조치를 내렸다. AFP통신에 따르면 미국은 윈모어 등 총 10척을 안보리 블랙리스트(제재 명단)에 올려 달라고 요구했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북한 선박 4척만 명단에 올리는 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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