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14일 밝힌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 경찰 이관 방안이 실현되면 경찰은 1961년 중앙정보부(중정·현 국정원) 출범 이후 57년 만에 대공수사권 전권을 다시 갖게 된다. 청와대는 경찰청에 신설되는 대공수사 전담 안보수사처(가칭)에 국정원 대공수사 인력을 대거 보낼 계획이다.
1961년 중정에 대공수사권의 중추를 내준 뒤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씨 고문치사 사건을 일으켜 대공수사기관으로서의 위상에 치명상을 입었던 경찰이 다시 대공수사의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것이다.
○ 대공수사 패러다임 바꾼 박종철 고문치사
경찰은 1945년 광복 직후부터 대공수사권을 독점하며 북한 간첩과 귀순자, 좌익사범 수사를 총괄했다. 당시 북한은 38선 주변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 수시로 남한에 간첩을 내려 보내 좌우익 진영 갈등을 조장했다. 경찰은 조선공산당 산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등 좌익 노동운동단체 수사를 주도하며 방첩 활동을 벌였다.
경찰 대공수사권은 1961년 6월 창설된 중정으로 상당 부분 넘어갔다.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중정에 대공 수사력을 집중해 통치 수단으로 활용했다. 경찰도 대공수사권을 갖고 있는 ‘투 트랙’ 구조였지만 굵직한 주요 사건은 모두 중정 몫이었다. 공안당국 관계자는 “당시 경찰의 핵심 대공수사 인력 상당수가 중정으로 건너갔다”며 “경찰이 중정을 큰집으로 부르는 관행이 그때 시작됐다”고 말했다.
경찰의 대공수사는 1984년 전두환 정부가 학원 자율화 조치를 선포하면서 좌경단체에 집중됐다. 대학에 상주하던 경찰이 철수한 뒤 대학 운동권에서 북한 체제를 추종하거나 사회 전복을 주장하는 세력이 성장하고 있다는 게 전두환 정부의 인식이었다. 경찰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방첩을, 홍제동 대공분실에 좌경단체를 맡겼지만 사실상 업무가 중첩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중정의 후신 국가안전기획부와 경찰은 권력의 입맛에 맞는 수사 성과를 내기 위해 과욕을 부리며 고문, 감금 등 불법을 자행했다. 그 민낯이 드러난 대표적 사건이 1987년 박종철 씨 고문치사 사건이다. 당시 치안본부 제5차장 산하 대공수사 조직은 운동권 선배의 소재지를 대라며 박 씨를 물고문하다가 숨지게 했다. 이 사건은 1987년 민주화의 물꼬를 텄고 이후 경찰의 대공수사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경찰의 대공수사는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대학가의 운동권 활동이 잦아들면서 위세가 약화됐다. 이후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대공수사 기능은 더 축소됐다. 주요 업무였던 방첩과 좌경단체 수사 대상이 점점 줄어들면서 탈북자 관리에 집중했다. 최근에는 전략물자 밀반출 등 새로운 분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 해외정보망 최우선으로 보강해야
청와대 구상이 현실화될 경우 대공수사를 총괄하게 될 경찰은 안보 수사 역량을 강화하는 방안 수립에 몰두하고 있다. 그동안 국정원이 주요 수사를 담당하고 경찰은 탈북자 관리에 주력해왔던 터라 일선 경찰관들의 안보수사 역량이 국정원에 비해 많이 부족했다. 특히 방첩 업무의 필수 요소인 대북 관련 첩보는 주로 북한과 연계된 해외에서 나오는데, 해외정보관이 없는 경찰로선 최우선으로 보강해야 할 대목이다.
경찰은 청와대가 안보수사국이 아니라 안보수사처 설치 방침을 밝힌 것은 대공수사의 독립성을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의지로 해석하고 있다. 처(處)가 국(局)보다 규모가 크고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당초 경찰은 기존 대공수사를 담당했던 경찰청 보안국을 안보수사국으로 확대 개편하는 방안을 고려했었다. 경찰은 안보수사처를 경찰청 산하 별도 조직으로 신설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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