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개막 나흘 앞으로 다가온 평창 겨울올림픽에 파견할 고위급 대표단에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파견하기로 하면서 남북, 북-미 간 평창 외교전의 라인업이 윤곽을 드러냈다.
북한은 4일 오후 11시 40분경 예고 없이 북한의 고위급 대표단 파견과 관련한 통지문을 보냈다고 통일부가 밝혔다. 김 위원장을 단장으로 단원 3명, 지원인원 18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파견한다는 내용이다.
김 위원장은 헌법상 북한 행정부의 수반으로 이미 외국 정상들과의 회담에 여러 차례 등장한 인물이다. 미국이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대표단장으로 평창에 파견하기로 한 가운데 북한도 상징적인 인물인 김 위원장을 파견하면서 격(格)을 맞추겠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맡으며 김정은 체제의 실세로 떠오른 최룡해 노동당 부위원장에 비해 여러 차례 국제사회와의 대화 테이블에 나섰던 김 위원장이 미국 입장에서도 대화 상대로 부담이 적을 수 있다는 점이 반영됐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김 위원장은 2013년 방북한 게리 프루잇 AP통신 사장과 만나 “김정은 위원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책적 목표는 경제 성장”이라며 “이는 미국이 평양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을 포기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김 위원장은 핵·미사일 개발과 관련이 없어 그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대상에 오른 적이 없는 점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펜스 부통령이 “전략적 인내는 끝났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방한하는 것”이라며 대화 국면 전환에 제동을 걸었지만 김 위원장과는 어떤 식으로든 접촉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이다.
북한이 이날 갑자기 김영남 대표 카드를 꺼낸 것은 평창 올림픽 기간 어떤 식으로든 미국과의 접촉을 이끌어 내 평창 모멘텀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해석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북한도 평창 올림픽이 중요한 기회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고 이번 기회를 흘려보내면 평창 이후 전개될 상황이 더 위험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아직 펜스 부통령이 김 위원장을 만날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한 외교 소식통은 “북한이 김영남을, 그것도 평창 올림픽 개막 전에 이렇게 공표한 전술적 배경 등을 면밀하게 검토한 뒤 펜스 부통령이 올림픽 기간 김영남을 만날지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김영남이 온다면 펜스 부통령,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등과도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북한이 급을 맞췄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김정은이 ‘2인자’ 최룡해에게 과도하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김영남을 앞세웠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룡해에게 너무 많은 직함이 몰려, 이번엔 김영남을 내세웠을 가능성이 있다. (김영남과 함께 올 가능성이 있는) 최휘나 태종수 등 김정은의 실세로 알려진 사람들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 측근의 방남을 기대했던 청와대는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에 따라 문재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청와대 회동도 성사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일반 참가국과는 다른 측면이 있는 만큼 누가 (대표단장으로) 오든 만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외교 소식통은 “김영남이 와서 고위급 회담이 열린다면 우리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나서는 게 급이 맞기는 하다. 하지만 김정은의 의중을 담고 왔을 북한 고위급 대표단의 이번 방남 하이라이트는 청와대 예방이 될 것이고 여기서 상호 관심사를 나눌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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