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일인 9일 북한의 고위급 대표단을 이끌고 오는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여태껏 방남한 북한 인사 가운데 최고위급이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5일 “북한이 진지하고 성의 있는 자세를 보였다”고 환영했다. 김정은이 꺼내 든 ‘김영남 카드’가 평창 너머로 남북 대화의 모멘텀을 확장시킬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 아흔 살에 처음 남한 땅 밟는 김영남
김영남에게는 ‘명목상 국가수반’이라는 말이 따라다닌다. 북한 사회주의헌법은 김영남이 맡고 있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 대해 “국가를 대표하며 다른 나라 사신의 신임장, 소환장을 접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김영남은 1998년 9월부터 19년 넘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다. 앞서 1983년부터 15년 동안 외교부장을 지내며 ‘북한의 얼굴’ 역할을 했다. 하지만 방남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교롭게도 방남이 전해진 4일은 그의 아흔 번째 생일이었다.
신년 들어 강한 유화 공세를 펼치고 있는 김정은에게 김영남은 가장 안정적인 카드 중 하나일 수 있다. 각종 핵·미사일 도발에도 지금까지 국제사회의 제재 대상에 오르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실권이 없다고 봐야 한다. 뒤집어 보면 북한 정권의 숱한 숙청에서도 살아남았을 만큼 1인자의 의중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역할을 충실히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김영남이 김정은의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할지가 가장 중요하다”며 “그런 역할은 김영남이면 충분하지 최룡해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외교관 출신의 한 고위 탈북자는 김영남의 스타일에 대해 “김일성이 벽을 가리키며 ‘저것은 문이다’라고 한다면 김영남은 그 말을 믿고 기어이 벽을 뚫고 밖으로 나가려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동시에 김영남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에 앞서 김영남을 만났다. 2007년 정상회담 때 노무현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국회 정보위원회 한 관계자는 “김영남은 나이가 아흔인데도 유연하다. (김정은이) 그래서 보냈다”고 설명했다.
○ 문재인 대통령, 김영남 단독 접견하나
이제 관심은 문 대통령이 김영남을 단독 접견할지에 쏠리고 있다. 김 대변인은 “다양한 소통의 기회를 준비해 나가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며 문 대통령과 김영남의 회동을 추진할 방침임을 밝혔다. 김 대변인은 “어젯밤 늦게 (김영남의 방남을) 통보받았고, 오늘 대통령을 비롯한 실무진이 어떤 수위에서 어떤 내용을 갖고 만날지 현재 논의 중”이라며 “확정되는 대로 발표하겠다”고 했다.
특히 김영남은 김정은의 친서를 갖고 방남할 것으로 보이는 만큼 결국 문 대통령과 단독 회담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과 김영남 간 만남의 격(格)을 검토 중이다. 김영남이 헌법상 국가수반이긴 하지만 정상회담이라고 하긴 어려운 만큼 남북 정상급 회담으로 부르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정부는 아직 북측이 공개하지 않은 대표단 단원들의 구성을 살피면서 북한과의 접촉 방식 및 수위를 정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대표단원 3명에 사실상 북한의 ‘2인자’ 자리를 굳힌 최룡해 노동당 부위원장이나 최휘 국가체육위원장이 포함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북한은 한 명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시킨다. 김영남이 온 마당에 최룡해까지 오면 시선이 분산된다”고 말했다. 이어 “(김정은의 동생) 김여정은 안 올 가능성이 높다. 백두혈통은 한 번도 방남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북측 대표단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방문 기간이 겹치는 만큼 관련국들과의 조율도 필요한 상황이다. 김영남은 개회식에 앞서 열리는 공식 리셉션에 참석해 자연스럽게 미국, 일본 등의 대표단과 마주칠 가능성이 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평창 올림픽 기간 중 북-미 대화 가능성에 대해 “커 보이지 않지만 닫아 놓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며 “(우리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간접적으로 노력할 수는 있겠으나 직접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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