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전 9시 49분, 천안함 폭침 주범으로 꼽히는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남측 땅을 밟았다. 4분 뒤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CIQ)에 도착한 그는 천해성 통일부 차관의 영접을 받으며 10시 11분경에 모습을 드러냈다.
“천안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어떤 점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하나”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정부는 김영철에 대해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실질적인 대화가 가능한 상대’라고 말해 왔다. 하지만 굳은 표정의 북한 대남 총괄책임자는 주변에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우리 정부가 준비한 검은색 제네시스 관용차에 올라탔다. 그를 두 발짝 뒤에서 따라가던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도, 앞서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 때도 김여정을 수행한 김성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장, 대남통 리현, 최강일 외무성 북아메리카국 부국장, 김명국 김주성 조봄순 등 수행원단 일동도 침묵했다.
북측 대표단이 숙소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김영철의 방남을 저지하기 위해 전날부터 밤샘 농성을 이어온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지지자들, 보수단체가 통일대교를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 결국 김영철 등 대표단은 통일대교 북쪽 삼거리에서 방향을 틀어 경기 파주시 파평면과 진동면을 연결하는 전진교를 건너 자유로 당동 나들목까지 약 14.7km를 우회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당은 “전진교는 일반 지도상에 나오지 않는 도로”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당 소속 김학용 국회 국방위원장이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군 작전지역’을 거리낌 없이 내줬다”고 지적하자 국방부 대변인실은 “북측 고위급 대표단이 이용한 ‘지방도 372호선 일반도로’는 군사도로나 전술도로가 아니다”라며 해명에 나섰다. 그러나 전진교는 372호선 도로 노선이 아니고 전진교 남단부터 당동 나들목까지 김영철 일행이 이용한 도로도 국도 37호선인 것으로 나타났다.
김영철은 이날 공개적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안함 폭침 주범의 방남 허용에 따른 거센 역풍을 의식한 듯 김영철 일행은 숙소인 서울 워커힐호텔에 도착해서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또 다른 취재진의 질문에도 아무 말도 안 하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방남 소감이나 점심 식사를 묻는 질문에도 입을 닫았다. 천 차관의 안내를 받으며 오후 4시경 KTX를 타고 평창 진부역에 내려 여러 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아무 말 없이 역을 빠져나갔다.
김영철의 향후 일정은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가 22일 “통전부장의 카운터 파트는 국가정보원장”이라고 밝힌 대로 서훈 국정원장과 조명균 통일부 장관 등 대북 정책 결정자들과의 면담도 예상된다. 하지만 정부가 김영철의 일정을 철저히 가리고 있어 이 역시 언제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는 현재로선 불투명하다. 정부 안팎에선 김영철의 방남 비판 여론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통일부는 이날 ‘평창 올림픽 북한 참가 종합설명자료’를 내고 “남북관계 진전과 한반도 비핵화의 선순환 구도를 형성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북한의 참가로 단절된 남북관계를 복원하고 한반도 평화를 정착하는 토대를 만들었다고도 자평했다. 그러면서도 “국민들의 다양한 우려와 지적을 겸허한 자세로 수용하고, 국민들의 대북인식 변화 및 젊은 세대의 가치와 요구 등을 직시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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