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은이 비핵화를 위한 북-미 대화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한반도 대화 국면의 불씨가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백악관이 환영 의사와 함께 완전한 비핵화를 재차 강조하면서 북-미가 실제로 마주 앉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청와대 역시 “한반도 평화 조성을 위한 실질적 기회가 될 수 있다”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는 8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미국 방문을 시작으로 대북 특사단이 들고 온 결과를 토대로 미-일-중-러 설득에 나선다.》
● 김정은의 전략은
부인 만찬 동석-특사단 깍듯한 예우… 파격적 제스처 체제보장-북미수교 염두 ‘불량국 아닌 정상국가’ 강조
북한 김정은은 5일 우리 특사단과의 회동에서 내용과 형식 모두 파격적으로 비칠 수 있는 모습을 보였다.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인정하고, 노동당 청사 본관에서 만찬을 열고, 부인 리설주와 동행한 게 대표적이다. 이를 통해 북한이 이상한 나라가 아닌 ‘정상 국가(normal state)’라는 점을 강조하려 했고, 더 나아가 미국이 이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김정은이 꺼내든 정상 국가 요구 카드는 대북제재 완화 차원을 뛰어넘어 체제 보장, 북-미 수교까지도 포괄하는 ‘패키지’인 만큼 이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얼마나 수용할지 현재로선 가늠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7일 청와대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정은은 특사단과의 회동에서 대부분의 합의사항을 먼저 제안했다. 특사단이 준비해 간 내용을 김정은이 선제적으로 밝히면서 “북한이 뭔가 다른 것을 요구한 것 아닌가”라는 관측이 나오지만 청와대는 “다른 요구조건은 없었다”고 밝혔다. 대북제재 완화에 대해서도 청와대는 “명시적으로 없었다”고 했다.
그 대신 김정은은 정상 국가라는 더 큰 차원의 논의를 언급했다. 국제사회에서 테러지원국, 불량 국가로 낙인 찍혀 있지만 국제사회의 규범을 지키는 보편적인 국가로 대우해 달라는 것. 한 외교 소식통은 “도발에 나서지 않으면서 방어적 군사훈련을 인정하고, 정상 간 직통 라인을 구축하는 것 등은 국제사회의 규범상 당연한 일들”이라며 “보편적인 국가 간에 제재는 없기 때문에 정상 국가를 꺼낸 건 대북제재를 끝내 달라는 의미도 자연히 포함된다”고 말했다. 여기에 김정은은 특사단과의 만찬에서 서훈 국가정보원장 자리로 걸어가 건배를 청하고,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두 손으로 받는 등 예의 있는 모습을 보였다. 여권 관계자는 “특사단과의 회동에 전 세계적인 관심이 쏠린 상황에서 안하무인의 독재자가 아닌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국가 원수의 모습을 보이려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이런 요구를 내놓은 건 체제 안정에 대한 자신감이 뒷받침됐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정부 관계자는 “김정은이 6년 동안 집권하며 내부 단속을 마쳤다고 생각한다. 2016년 헌법을 개정해 국무위원회를 신설하고 자신이 위원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정상 국가화(化) 로드맵을 추진해온 것의 연장선”이라고 말했다. 김정은이 특사 접견 과정에서 보인 특유의 파격적인 행보도 정상 국가 인정 요구로 북-미 현안을 ‘원샷’에 풀려는 것과 닿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관건은 김정은의 이런 요구를 미국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비핵화의 의지를 북한이 보인 만큼 미국이 북한의 체제 보장 등 후속 카드를 고민해야 할 것”이라며 대화로 이어질 가능성을 점쳤다.
하지만 지나친 낙관론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체제 보장을 넘어 북-미 평화협정 체결로 이어질 수 있는 정상 국가 카드를 트럼프가 현 단계에서 덜컥 받아야 할 계기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결국 대북제재 때문에 김정은이 대화 테이블에 나온 것인 만큼 트럼프는 북한을 정상 국가로 인정할지를 판단하기 전에 비핵화 의지가 검증 가능한 것인지를 살필 것”이라고 강조했다. 외교부 2차관을 지낸 김성한 고려대 교수는 “김정은은 선언적 비핵화를 했을 뿐이고 트럼프와 국제사회는 검증된 비핵화를 원하고 있다. 정상 국가는 아직 먼 이야기”라고 말했다.
● 트럼프의 전략은
“압박작전 효과… 前정권과 다르게” 제재 강화할수도 北, 과거에 대화 제의뒤 핵개발… 美 “진의파악 우선”
“우리는 전에 그런 영화를 여러 번 봤다. 결말이 매우 나쁜 영화의 최신 속편을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니다.”(미국 백악관 고위 관계자)
미 백악관은 북한의 비핵화 대화 의사 표명에도 ‘최대한의 압박’ 작전을 늦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27년간 반복된 북-미 대화 실패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이 흔드는 ‘올리브 가지’가 핵무기 완성의 속내를 감추기 위한 ‘무화과 잎’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 최대한 압박 작전의 끈을 놓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6일(현지 시간) 자신이 대북정책을 펼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이 무엇인지 다시 똑똑히 밝혔다. 바로 ‘뭘 하든 지난 정권과는 다르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클린턴, 부시, 오바마 행정부를 돌이켜보라. 일이 풀린 적이 없다”며 “어떤 방향으로든 뭔가를 해야 한다. 상황이 더 썩도록 방치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전임 행정부와 가장 차별되는 부분이 북한의 수출을 90%까지 차단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와 미국의 제재 압박이라고 인식한다. 그는 북한의 대화 의사는 “북한에 대해 우리가 한 일과 제재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대화 제의를 “진정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과 관련해 한 외교 소식통은 “김정은이 줄곧 반대해온 한미 연합 군사훈련에 대해 이해한다는 뜻을 전한 것이 워싱턴에 (진정성에 대한) 믿음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협상에 능한 트럼프 대통령이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할 경우 중국과 국제사회에 대북 압박을 더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전임 행정부와의 차별화 노력에도 북한의 대화 제의에 대해 “이미 여기까지 와 본 적이 많다”는 신중론도 나온다.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은 “과거 대화 제의가 숨은 의도를 감추는 무화과 잎으로 판명났었다”라고 말했다. 북한은 1994년 제네바 합의를 깨고 핵 개발을 계속했고 2005년 9월 5자회담을 통해 ‘9·19공동성명’에 합의했지만 이듬해 미사일 및 핵실험을 강행했다. 2012년의 2·29합의도 장거리 로켓 발사로 깨졌다.
미 정부는 이번 주 워싱턴에서 대북 특사단을 만나 북한의 진의를 확인하고 북-미 대화 등에 대한 입장을 정리할 것으로 보인다. 헤더 나워트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미국 정부는 한국 당국자들과 만나 북한과 관련해 어떤 조치를 할지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6일 ‘핵 동결 의사만으로도 북한과 대화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선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며 북한의 의도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
미국 내에선 북한이 핵과 미사일의 조건부 중단 의사를 밝힌 ‘핵미사일 모라토리엄’도 얻어낼 게 없으면 얼마든지 깰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4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미 연합훈련 중단, 주한미군 철수 등의 ‘북한식 비핵화 공세’에 나서 한미동맹의 균열을 노릴 가능성도 제기된다. 백악관 고위 관계자도 “우리는 한국을 굳게 믿고 있으며 매우 긴밀하게 연락하고 있다”며 “이번 주말 한국과 회의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패럴림픽이 끝나면 방어 목적의 한미 연합훈련이 재개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상준 alwaysj@donga.com·신나리 기자·뉴욕=박용 특파원 parky@donga.com / 한기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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