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의 특수활동비 요구에 남재준 전 국가정보원장이 일종의 월권으로 보고 탐탁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통령에게 따져 묻기는 어려웠다.”
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국정원 특활비 상납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오모 전 국정원장 정책특별보좌관이 털어놓은 진술이다. 오 전 보좌관은 남 전 원장 지시로 2013∼14년 매달 5000만 원씩 총 6억 원을 박근혜 청와대에 전달했다. 그는 “남 전 원장이 (특활비 상납에 대해) 과연 적절한 행동인가, 비서관들이 장난치지 않을까 순간 의구심이 든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러나 국정원 수뇌부는 끝내 최고 권부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오 전 보좌관은 “(남 전 원장이)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해 사실이냐고 따져 묻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했다. 검찰총장과 경찰청장, 국세청장과 더불어 4대 권력기관장으로 꼽히는 국정원장조차 청와대 비서관의 전화 한 통에 ‘비밀’ 금고문을 연 것이다.
○ ‘권력기관장 인사권’ 견제 빠져
문재인 대통령이 26일 발의할 예정인 헌법 개정안 전체 조문 공개 직후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선하는 데 부족하다는 지적이 정치권과 전문가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대통령 권력의 원천인 인사권, 그 가운데서도 4대 권력기관장 인사권이 여전히 대통령 손에 쥐여져 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시선이 많다. 주요 권력기관장 인선 과정에서 대통령 견제 장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대통령제가 탄생한 미국에서도 각 부처 장관은 물론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 국장, 각국 대사 등에 대해 상원 인준을 거치도록 돼 있다. 우리나라도 권력기관장 등에 대해 인사청문회만 할 것이 아니라 국회 임명 동의 절차를 추가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고문현 한국헌법학회장(숭실대 교수)은 “이명박 전 대통령 구속에서 보듯 대통령이 바뀌어야 검찰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는 게 현실이다. 주요 권력기관장 인선에서 국회 검증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여당 내부에서도 권력기관장은 물론 장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준투표를 의무화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청와대는 감사원의 ‘독립기관화’를 위해 대통령과 국회, 대법관회의가 각 3명씩 감사위원을 선임토록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대법관회의가 사실상 대통령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감사원이 완전한 독립기관으로 기능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회 지명 3명 중 여당 몫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대통령이 선임에 영향을 미치는 감사위원은 최소 7명”이라고 지적했다.
○ ‘대독 총리’ 권한 그대로
내각을 이끄는 국무총리 권한과 임명절차에 대한 개헌안이 제왕적 대통령 권한을 견제하는 데 미흡하다는 시각도 있다. 청와대는 책임총리제 구현을 위해 현행 헌법 조항(‘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한다’)에서 ‘대통령의 명을 받아’라는 문구를 뺐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대독 총리’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취약한 총리 권한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데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고 학회장은 “총리의 ‘대통령 보필’ 문구를 빼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총리에게 분담할 국정 권한과 역할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대통령 개헌안에서 국회의 국무총리 임명은 물론 추천 권한까지 배제한 것도 도마에 올랐다. 청와대는 국민들의 국회 불신이 깊고 대통령제 지지율이 높기 때문에 사실상의 의원내각제로 흐를 수 있는 국회의 임명·추천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여야가 총리 후보를 복수로 추천한 뒤 대통령이 낙점토록 하면 대통령의 인사권을 충분히 보장할 수 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 ‘사법부 독립’ 역행 우려
이른바 ‘거점 판사’ 논란을 의식해 대법원장의 인사권을 약화시키는 과정에서 사법부에 대한 대통령의 입김이 오히려 세졌다는 우려도 있다. 개헌안에 따르면 대법관추천위원회의 추천을 거쳐 대법원장이 대법관 임명을 제청토록 했다. 문제는 대법관추천위가 대통령 지명 3명, 대법원장 지명 3명, 법관회의 선출 3명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그동안 대법관을 추천할 수 없었던 대통령이 추천 단계부터 개입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차 교수는 “대법원장에 대한 실질적 임명권이 대통령에게 있고 대법원장이 대법관 전체에 대해 제청권을 갖는 한 사법부 독립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헌법재판소장 임명권을 삭제하고, 헌재 재판관들이 호선(互選)으로 소장을 결정하는 개헌안을 마련했다. 헌재에 대한 대통령의 영향력을 줄였다는 게 청와대 설명이다. 그러나 호선으로 인해 헌재소장 임명 시 국회 동의가 필요 없어진 만큼 국회가 개입할 여지가 사라졌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입법부의 동의라는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할 여지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정부의 법률안 제출권을 제한하고 입법권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정부의 법안 발의 요건에 ‘국회의원 10명의 동의’를 추가한 것도 실효성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 현재도 정부가 의원 입법을 추진할 때 여당 국회의원들을 동원하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삼권분립 차원에서 입법권은 국회에만 주는 게 옳다는 반론이 나오는 이유다.
○ 여야 정치권 팽팽한 시각차
이제 개헌안 논의는 국회로 넘어왔다. 대통령 개헌안을 놓고 여야 정치권의 의견이 엇갈리는 핵심 쟁점은 역시 대통령 권한 축소다.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여론을 근거로 국회가 국무총리를 임명하거나 추천하는 권한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우원식 원내대표는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선호하고 있고 한국의 정치 특성까지 감안했을 때 대통령제는 매우 당연한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 인사권을 보장하려면 현행대로 국회의 총리 임명 동의권만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야4당은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려면 반드시 총리 임명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반박한다. 자유한국당은 “책임총리 구현을 위해 국회 선출 혹은 추천이 필수”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민주평화당과 정의당은 국회가 추천하는 책임총리제를 내걸었고, 바른미래당은 국회에서 총리를 선출하거나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여야 협상의 열쇠를 쥔 정당은 개헌 저지선을 확보한 제1야당 한국당이다. 한국당은 “야4당이 정책협의체를 구상해 국민 개헌안을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평화당과 정의당이 반대해 야4당의 별도 개헌안을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군소야당을 끌어들이기 위해 민주당에 이어 한국당도 선거제도 ‘비례성 강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방침을 밝혀 주목된다.
대통령 개헌안 발의 이후 1차 고비는 청와대의 국민투표법 개정 요구 시한인 다음 달 27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어 국회가 개헌안을 의결할 수 있는 데드라인인 5월 25일도 개헌 성패에 분수령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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