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강력한 대화 의지를 보이며 남북, 북-미 정상회담 개최에 전격 합의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결국 가장 먼저 만난 정상은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었다. 이번 만남을 시 주석이 먼저 제안하고, 김 위원장이 수락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김 위원장이 결국 한미와 중국 사이를 오가며 몸값 높이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 김정은, 대화 모멘텀 장악 승부수
27일 복수의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은이 처음으로 중국 측에 관계 개선 의사를 내비친 시점은 지난달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 때다. 당시 개회식에 참석한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한정(韓正)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에게 특사 교환 등 의사를 밝혔고,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고 한다.
서로 관계 정상화 의지만 확인한 채 눈치만 보던 북-중이 지난주를 기점으로 그 실행 방식을 놓고 머리를 맞댄 건 결국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의식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천영우 전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미국이 ‘초강경 매파’로 외교안보 라인업을 구축해 대북 압박에 나선 상황에서 김정은이 시 주석의 첫 베이징 초청이란 손길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일각에선 김정은이 최근 리용호 외무상, 최강일 외무성 부국장을 각각 스웨덴, 핀란드로 보내 미국 측 기류를 탐색했지만 미 관계자들로부터 비핵화에 대한 만족할 만한 반대급부를 확인하지 못하자 ‘보험’ 차원에서 중국으로 눈을 돌린 것이란 분석도 있다.
동시에 김정은이 기습적으로 베이징행 열차에 몸을 실은 것은 다음 달부터 남북, 북-미 ‘릴레이 정상회담’에 앞서 시 주석과의 회담을 시작으로 선제적으로 판을 이끌고 국제사회의 이목을 다시 한 번 집중시키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아버지 김정일 못지않게 돌발적인 김정은은 충격요법을 어떻게 써야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며 “앞으로 미중은 물론 일본, 러시아 정상들과의 관계까지 부각시켜 자신을 이 같은 대화 모멘텀의 꼭짓점에 두려고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김정은이 다른 나라들의 예상보다 반 박자 빨리 움직임으로써 협상력을 높이겠다는 전략에 따른 행보”라며 “트럼프 행정부에도 ‘미국과 여의치 않으면 북-중 관계를 얼마든지 만들어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이전에 북한이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썼던 등거리 외교를 미국과 중국으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시 주석의 대북 인식 변화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 혈맹이자 ‘아우 나라’인 북한이 중국과 패권 경쟁을 하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전격 합의하자 시 주석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정보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북한이 본격적인 회담 국면에 나서 ‘차이나 패싱’ 논란이 가속화하기 전에 김 위원장의 의중을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 김정은, 혈맹의 무게 재확인한 듯
아무튼 김정은이 2011년 12월 집권한 뒤 7년 만에 첫 공개 해외 일정을 방중(訪中)으로 정한 것은 결국 양국이 쌓아온 유산, 즉 북-중 관계의 무게를 실감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 김일성, 김정일이 결국 중국과의 원만한 관계 속에 장기 집권의 토대를 닦았던 만큼 김정은도 핵무력 완성 선언 이후 올해 이어질 외교 격변기에 중국이란 배경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정영태 북한연구소장은 “중국이 공식적으로 북한을 ‘용도 폐기’ 선언하며 내치지 않는 한 북한은 절대 중국을 먼저 무시하거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는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20일 막을 내린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국가주석 등 임기 제한 폐지’ 등이 포함된 헌법 수정안을 통과시키며 시 주석의 장기집권 체제가 완비되자 가급적 빨리 시 주석과의 관계를 복원해야겠다고 느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김정은은 양회 후 최근 시 주석에게 축전을 보냈다.
대북제재로 인한 피해가 올 상반기에 본격화하면서 김정은이 타개책 마련을 위한 중국행에 나섰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특히 시 주석이 듣기 원하는 비핵화 의지를 직접 전달하며 대북제재 완화나 향후 미국과의 협상 불발 시 기댈 군사적, 경제적 ‘언덕’을 약속받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 정부 당국자는 “김정은이 이번 방문에 앞서 중국에 일부 제재 완화 의사를 타진하고, 중국은 ‘은밀하게’ 긍정적인 답변을 줬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멜리사 핸햄 미 제임스 마틴 핵무기확산방지연구센터(CNS) 연구원은 블룸버그통신에 “북-중 지도자의 만남이 확인된다면 그것은 트럼프와 김정은이 몇 주 뒤 가질 포토 오프(photo op·정치가 등이 선전을 위해 연출한 사진 촬영)보다 (김정은에겐) 훨씬 생산적인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성욱 고려대 행정대학원장은 “북-중 간에는 오래전부터 당 대 당 물밑 교류를 해왔고 중국이 유심히 상황을 지켜보다가 한반도 대화 프로세스에 본격적으로 숟가락을 얹기 시작한 것”이라며 “김정은은 중국에 요구하고, 시 주석은 북핵 6자회담 당사국으로서 몫을 챙기겠다는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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