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은의 전격 방중 이후 벌써부터 러시아행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일본 정부는 ‘저팬 패싱’을 우려해 김정은과의 회동을 더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분위기다. 그야말로 남북은 물론이고 한반도 주변국 정상들이 김정은을 가운데 두고 양자(兩者) 또는 다자(多者) 간 접촉을 하고 필요에 따라 합종연횡하는 ‘신(新) 6자 보스 회담’ 구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기존 6자 회담은 각국의 실무진이 나서 협상의 무게감이 떨어졌지만 이번엔 각국 정상이 비핵화 협상과 논의에 직접 나서고 있어 엇비슷하지만 판 자체가 다르다.
러시아 국영 타스통신은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4월 중순 모스크바 방문 일정을 조율 중”이라고 보도했다. 러시아가 6자 회담 당사국인 데다 수많은 북한 노동자가 시베리아 벌목공 등으로 파견나간 곳인 만큼 회동 결과에 따라 김정은은 달러까지 챙길 수 있다. 천영우 전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최근 미국과 관계가 벌어진 푸틴 대통령 역시 북한을 레버리지(지렛대)로 서방 국가들과의 협상력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했다.
일단 러시아 정부는 북-러 정상회담 가능성에 선을 긋고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28일(현지 시간) “아직 북-러 정상회담 일정은 잡힌 게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 고위 관계자는 29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푸틴이 김정은과 함께 선 포토라인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회담 직전까지 밝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북-러 정상회담은 빠르면 4월 초에도 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손기웅 통일연구원장도 논평을 내고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중국에 이어 러시아의 지지가 필수적인 데다 김정은의 체제 안전과 경제 지원에 대한 러시아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며 북-러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을 높게 봤다.
김정은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만날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29일 “북한 당국이 간부들에게 ‘6월 초 북-일 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매체들은 공공연히 대북 경제 지원 가능성도 거론하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안보 문제의 상대는 미국이지만 대규모 경제 지원을 바랄 상대는 일본뿐”이라며 “북한이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하면 200억∼500억 달러(약 21조6000억∼54조1000억 원)의 지원을 받을 거란 기대감이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만나더라도 아베 총리는 지금 상황에서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높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김정은은 일본과 성급하게 만나 협상판에 끌어들이면 한미일 공조가 끈끈해져 자신을 역으로 압박할 가능성을 우려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라는 시간표가 요동치고 선수들이 추가되는 데 대해 청와대는 “나쁠 게 없다”는 반응이다. 중-일-러 등이 참여하면 오히려 북한의 비핵화 약속을 더 확실하게 보장받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 청와대 관계자는 “다자 협상의 경우 북한이 취할 수 있는 경제적 실리도 많아져 북한의 비핵화를 더 적극적으로 설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현 구도는 김정은이 한반도 운전석에 앉아 사실상 필요에 따라 정상들을 ‘골라’ 만나는 상황인 만큼 비핵화 논의의 주도권을 자칫 뺏길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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