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현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정감사장. 당시 국민의당 손금주 의원(현 무소속)은 “공기업 경영의 중심에서 문제점을 바로잡고 기관장을 견제해야 할 공기업 감사가 여권의 낙하산 인사로 채워지고 있다”며 “도를 넘었다”고 비판했다. 당시는 박근혜 정부 4년 차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손 의원이 “도를 넘었다”고 지적한 이유는 한국전력공사의 발전 자회사 5곳 가운데 4곳의 상임감사가 집권여당이던 새누리당 출신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2016년 3월 임명된 김선우 한국중부발전 상임감사는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직능총괄본부 미래희망 중앙부위원장 출신이고, 김오영 한국동서발전 상임감사 역시 새누리당 경남도당 대변인을 지냈다. 또한 박대성 한국서부발전 상임감사는 새누리당 충남도당 사무처장 출신이다. 2016년 7월 임명된 최상화 한국남동발전 상임감사도 새누리당 사무처 직능국장을 지낸 뒤 대통령비서실 춘추관장을 역임했다. 그해 10월 취임한 유구현 한국남부발전 상임감사를 제외하고 발전 자회사 4곳의 상임감사가 모두 ‘새누리당 출신 인사’로 채워진 것이다.
공기업 낙하산 인사 논란은 역대 정권마다 불거진 단골 메뉴였다. 이명박 정부 초기였던 2008년 10월 국정감사에서 공기업 낙하산 인사를 비판하는 당시 야당 의원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우제창 당시 민주당 의원은 “(이명박 정부 들어)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공기업 및 공공기관 신규 임원 임명이 낙하산 인사로 얼룩져 공기업 개혁 취지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임명된 공공기관 임원 44명 가운데 11명이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출신 공천 탈락자이거나 대선캠프 출신이라며, 특히 18대 총선에 공천을 신청했다 탈락한 인사가 대거 낙하산으로 공공기관 임원에 임명됐다고 비판했다.
○ 역대 정권마다 불거진 단골 메뉴
지난해 5월 촛불민심을 등에 업고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며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어떨까. 3월 26일 현재 문재인 정부 들어 새롭게 공기업 감사 또는 감사위원에 임명된 이는 15명. 이 가운데 상당수는 문 대통령 당선에 일조한 대선 공신이거나 여당 출신 인사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전원자력연료 상임감사에 임명된 김명경 감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 임기 말에 구성됐던 참여정부평가포럼 대전·충남 사무처장 출신으로 민주당 대전광역시당 윤리위원장과 대전시의원을 역임했다. 한전KDN 감사에 임명된 이오석 씨는 더불어민주당 광주광역시당 상무위원 출신이다. 송기정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상임감사도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한 뒤 민주당 서울 강동갑 위원장과 서울시당 사무처장, 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등을 지냈다. 그랜드코리아레저 상임감사로 임명된 임찬규 감사는 민주통합당 사무부총장 출신이다. 임 상임감사는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연구위원, 참여정부 대통령비서실 국정상황실 행정관 등을 지냈다. 이동윤 한국주택금융공사(주택공사) 상임감사는 부산시의원 출신으로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의 부산 선거대책위원회 대외협력단장을 맡았다. 주택공사는 이 감사 외에도 손봉상 남경이엔지 상무와 조민주 변호사를 비상임이사로 선임했다. 손 비상임이사는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기획위원을 지냈고, 문 대통령의 19대 국회의원(부산 사상) 시절 민주당 소속으로 사상구의원을 역임했다. 조 변호사는 지난 대선 때 문재인 캠프에서 일했다고 한다.
최근 모 금융 공기업 임원추천위원회의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면접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5명의 후보자 면접이 있었는데, 정치권 출신 인사는 자기소개부터 남달랐다. 임원이 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은 없고, 청와대 누구 또는 여당 누구와 함께 일했다는 정치 이력을 한참 얘기하더라. 관료나 학자 출신에 비해 직무 관련성이 적다고 생각해 낮은 점수를 줬는데, 나중에 보니 3배수 최종 후보에 올랐다고 한다. 그 후보가 임명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정치권 출신이 무척 센 것 같다.”
지금까지 문재인 정부가 선보인 공공기관 임원 인사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고 보기 어렵다. 전문가보다 캠프나 여당 출신 인사를 중용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특징은 공공기관의 주요 임원 인사가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 후 지역별 나눠 먹기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대전 유성구에 자리 잡은 한전원자력연료 상임감사에는 전임자에 이어 후임자도 지역 정치권 출신 인사가 임명됐다. 여야 정권 교체에 따라 출신 정당은 바뀌었지만 지역 연고가 있는 정치권 출신이 번갈아가며 한전원자력연료 감사 자리를 맡고 있는 것이다.
○ 전문성보다 지역 연고?
부산으로 본사를 이전한 주택공사의 상임감사에 부산시의원 출신 이동윤 감사가 임명되고, 전북 전주시로 이전한 국민연금공단 상임감사에 이춘구 전 KBS 전주방송총국 보도국장이 임명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지방 이전 공기업 임원 자리에 지역 연고가 우선 반영되는 게 아니냐는 것.
특히 이정환 주택공사 사장은 본사가 위치한 부산지역에서 2012, 2016년 총선 때 두 차례 출마했다 낙선한 이력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주택공사 안팎에서는 이 사장 임명이 2020년 차기 총선을 염두에 둔 장기포석이란 해석까지 나오고 있다.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임명을 두고도 지역 정가에서는 비슷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2016년 총선 때 국민의당 정동영 의원(현 민주평화당)에게 패했던 김 이사장이 지역 내 공공기관장에 임명된 것은 차기 총선 준비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을 낳고 있는 것. 전북지역 한 인사는 “전주 여목사 봉침 사건 논란 등 벌써부터 신경전이 대단하다”고 귀띔했다.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은 수도권 과밀화 해소를 통한 국토균형발전을 위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중 시작한 사업이다. 국토균형발전이란 좋은 취지로 시작된 공기업 지방 이전을 지역 정치권 인사들의 자리 나눠 먹기로 변질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한 공기업 관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역 정치권 인사들로 하여금 공공기관 임직원 자리를 나눠 가지라고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한 것은 아닐 터”라며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공공기관의 설립 취지에 걸맞은, 능력과 전문성을 갖춘 공공기관 임직원 인사가 아쉽다”고 말했다.
공공기관은 말 그대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정부가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준 기관들이다. 따라서 이들 기관이 얼마만큼 효율적으로 운영되느냐에 따라 국민 삶도 영향을 받는다. 특히 공기업의 2인자 격인 상임감사는 조직 내부비리를 감시하거나 회계업무를 감독하는 등 파수꾼 구실을 해야 한다. 공공기관이 제 기능을 다하는 데 ‘메기’ 노릇을 해야 하는 이들이 바로 감사다. 감사는 사장 등 임직원 직무를 감찰하기 때문에 사실상 조직 내 2인자로 여겨진다. 이명박 정부 때 자원외교 등 정권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에너지 사업에 공공기관이 동원되고 일부 공기업의 부실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공공기관 감사의 제 역할과 기능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한 공기업 감사는 “공기업 사장은 임기 내 성과를 내려 하기 때문에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며 “따라서 감사는 사업과 업무의 적정성을 따져 공공기관이 국민 눈높이에 맞게 운영되도록 브레이크 기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공기업의 고질적 문제인 방만 경영을 제어할 수 있는 이도 감사”라며 감사의 역할론을 강조했다.
○ 방만 경영 막는 파수꾼
공공기관 주요 임원 인선이 대선에 공을 세운 이들에 대한 논공행상으로 흐르고, 공공기관 지방 이전 후 지역 정치권 출신 인사들의 ‘일자리’로 전락하면서 감사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해당 공기업 업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정치권 인사가 감사로 갈 경우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 변호사이자 KAIST(한국과학기술원) 겸임교수인 김승열 교수는 언론 기고를 통해 “집행 임직원의 비리를 적발하는 것뿐 아니라, 기관 업무 집행의 적정성을 점검하고 관리·감독하는 감사는 전문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권 한 인사도 “공공기관 채용비리 등 각종 비리가 끊이지 않는 것은 내부 자정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며 “내부감사 기능이 제대로 가동된다면 반복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일부 낙하산 공공기관 임원은 임기 동안 자리만 차지하고 조용히 지내다 선거가 다가오자 출마를 위해 그만두기도 했다. 한 공공기관 간부는 “정치권 출신이든, 낙하산 인사든 임기를 채워 맡은 임무를 다하려는 인사라면 누가 오든 상관없지만,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언제든지 떠나려는 인사만은 막아줬으면 좋겠다”며 “지역 내 유지들을 만나 제 입지만 굳히려는 모습을 좋게 볼 직원이 누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한편 문재인 정부가 집권 1년이 다 되도록 공공기관 임원 자리를 비워두고 있는 것과 관련해 지방선거 낙천자, 낙선자 배려를 위해 자리를 비워두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이에 대해 여권 한 인사는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없이 곧바로 임기가 시작됐기 때문에 차분히 인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며 “공공기관장과 감사 임명을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지방선거 낙천자나 낙선자를 배려하기 위해 일부러 자리를 비워두고 있다는 것은 억측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 2008년 총선 낙천자 또는 낙선자를 대거 공공기관 임직원으로 내려 보냈다 국정감사에서 야당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다. 9년 만에 집권에 성공한 문재인 정부는 얼마나 달라진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문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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