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의정 활동을 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저런 식으로 피감기관의 돈을 받아 해외에 가본 적은 없다.”
여당의 한 중진 의원은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이 초선 국회의원 시절 피감기관의 돈으로 해외 출장을 간 것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자 10일 이렇게 말했다. 김 원장은 이날 언론 인터뷰에서 피감기관 지원 출장에 대해 “반성한다”면서도 “19대 국회까지는 조금 관행적으로 이루어진 부분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김 원장 말처럼 국회 자체 예산이 아니라 피감기관을 비롯한 외부 기관의 지원을 받아 해외 출장을 가는 게 과연 관행이었을까. 동아일보가 김 원장 출장 논란 후 접촉한 20여 명의 여야 의원들의 답변과 19대 국회 전후의 상황으로 미뤄볼 때 ‘일반화된 관행’으로 규정하긴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의원들은 대부분 “19대 국회는 물론이고 나는 지금껏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다선 A 의원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김 원장이 ‘국회의 관행’이라고 말한 것은 국회의원 대다수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며 “의원 시절 공직자의 높은 도덕성을 강조했는데 피감기관을 통한 출장 논란을 관행이라며 피하려는 것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고 비난했다. 야권의 다선 B 의원은 “각종 협회나 공공기관 등 피감기관이 많은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에서 오랫동안 일했지만 피감기관과 가는 해외 출장 제의는 거절했다”고 말했다. 야권의 3선 C 의원은 “나도 몇 번 (피감기관 돈으로) 출장을 나갔고 관행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출장의 내용과 대가 관계 등을 면밀히 따져봐야 하며 그런 점에서 김 원장의 출장은 불법성이 짙다”고 말했다.
사실 의원들의 ‘스폰서 출장’을 막기 위한 통제장치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국회의원들이 피감기관을 포함해 외부 지원을 받아 해외 출장을 가려면 국회의장에게 보고하도록 한 윤리실천규범은 1991년, 국외활동 신고에 관한 지침은 2000년부터 이미 시행돼 왔다.
17대 국회부터 19대 국회까지 이어진 국회의 특권 폐지 운동과 해외 출장 관련 추문들도 김 원장의 ‘관행론’과 배치된다. 17대 국회에선 ‘차떼기 대선 자금’ 논란 이후 이른바 ‘오세훈법’으로 불리는 정치자금법이 개정되면서 국회 차원의 자정 운동이 벌어졌다. 2004년 관광성 해외 출장 하지 않기 등의 구호가 여야에서 앞다퉈 나왔다. 해외 출장에 대한 수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새누리당 박상은 전 의원 등이 국토해양위원회에 있으면서 한국선주협회로부터 3000여만 원을 지원받아 해외 항구 시찰을 다녀온 것에 대해 검찰은 2014년 9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기소하기도 했다. 비록 무죄는 났지만 의원들 사이에선 “해외 출장이 범죄가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이 퍼진 시점이다.
이런 움직임들은 김 원장이 출장을 갔던 2015년 전후에 강하게 일어났다. 특히 이때는 국회가 청탁금지법(김영란법) 처리를 논의하던 때였고 김 원장은 관련 법안 상임위인 정무위원회의 야당 간사였다.
덕성여대 조진만 교수(정치외교학)는 “김 원장은 스스로를 늘 ‘반부패 활동을 해온 시민단체 출신’이라고 강조해 와 그를 보는 국민들의 눈높이가 높아져 있다. 그런데도 ‘관행’이라는 해명을 하는 것을 보면, ‘선민의식’이 오히려 성찰에 방해가 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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