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주체는 남과 북이고 미국, 중국이 담보해주는 형식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지난달 29일 제주 서귀포시 제주롯데호텔에서 열린 ‘제3회 한·중 전략대화’에서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67)는 “평화협정 당사국에 대해 국내에서도 논쟁이 많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날 행사는 외교부가 주최하고 동아시아재단과 중국 판구연구소가 공동 주관했다. 판구연구소는 2013년 설립된 중국 정책 연구기관으로 중국 내 주요 싱크탱크 중 하나다.
● 문 특보 “남북이 평화체제 중심, 미·중은 담보자 역할”
이날 회의에선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과정에서 중국의 역할이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한·중 전문가들은 중국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 공감대를 형성했다. 다만 중국의 개입 정도와 시점에 대해선 한중 학자 간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특히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누가 주도할 것이냐에 대해서 일부 이견을 드러냈다.
스인홍(時殷弘) 중국런민대 국제관계학원 특훈교수는 “중국이 현재와 같이 목소리를 내면서 북핵문제 해결에 실제 참여해야 한다”며 “북핵 논의 과정에서 중국의 이익과 관심사가 소외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문한 것이다. 장투오셩(張¤生) 중국 국제전략연구기금회 학술주임도 “북한이 비핵화를 결심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대체불가한 적극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중국이 평화협정에 참여해야 더욱 역사적 의의와 대표성을 지니고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며 중국 참여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문 특보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에 대한 개념 정리를 제안했다. 문 특보는 “먼저 종전선언은 현재 적대관계 있는 국가들끼리 적대관계를 청산하자는 정치적 선언을 의미하는 것이고 평화협정은 앞으로 평화관계를 유지하고 심화시킬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남북미 삼자가 우선 올해 안으로 종전을 선언해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이나 조약으로 전환하자는 것이 한국 정부의 생각 같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남북이 평화체제 구축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장샤오밍(張小明) 중국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장은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남북미중 모두 중요한 당사자”라면서도 “굳이 분류하자면 북한과 미국이 핵심국이라고 생각한다”고 ‘한국 역할론’의 한계를 언급했다. 황재호 외국어대 국제학부 교수는 “평화체제 논의 과정에서 한국의 중개 역할이 축소될 수도 있다”면서 “한중간 소통의 뉘앙스까지 주의하면서 오해를 줄여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부 중국 학자는 ‘중국 패싱론’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루오옌화(羅艶華)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교수 “4·27 판문점 선언 중 종전선언 주체를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이라고 표현해 중국을 사실상 없어도 되는 대상으로 봤고, 6·12 북-미 공동성명에서는 아예 중국이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장 주임은 “미국은 중국과 한국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싱가포르 공동성명에서 중국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미중 무역 전면전 가면 북한 생각 바뀔 수도”
한중 전문가들은 미중 간 통상 마찰이 북한 비핵화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김성환 전 외교부장관(65)은 “미중간 무역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혹시라도 중국이 한반도 문제를 ‘레버리지(지렛대)’로 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고 하자 장 주임은 “마찰이 있어도 (미중이) 전면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면 비핵화에 큰 영향은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 주임은 또 “최악의 시나리오로 미중 간 무역 전면전이 벌어지면 북한의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고 밝혔다.
북한 비핵화 이후 경제 개방 국면에서 한중 경제 협력 가능성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 최필수 세종대 국제학부 교수(45)는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 중 중국·몽골·러시아 경제회랑(연결구상)과 한반도를 직접 연계해야 한다”며 “지역수요가 부족한 중·몽·러 경제회랑에 7500만 인구의 한반도가 참여하면 거대한 수요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딩도우(丁斗)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교수는 현재 한중 경제 관계에 대한 진단을 내놨다. 딩 교수는 “모바일 결제, 금융과학기술 등 새로운 영역에서 이미 한국은 중국에 뒤쳐져 있는 게 사실”이라며 “한중 무역 관계에서도 1990년대 초 이래 한국이 계속 흑자를 냈으나 그 흑자액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향후 중국의 한국에 대한 직접 투자 수치가 크게 증가할 것이고 서비스 분야가 향후 한중 무역의 주요 분야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날 회의에는 문 특보, 김 전 장관 등을 비롯해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86), 이해찬 전 국무총리(66), 박은하 외교부 공공외교대사(56·여) 등 한국 측 전문가 18명과 중국 측 전문가 12명이 참석했다.
제주=권오혁 기자 hy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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