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겨울올림픽이 한창이던 2018년 2월 19일. 제8회 화정 국가대전략 월례강좌에 연사로 초대된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은 문득 ‘파시(波市)’라는 다소 생소한 단어를 화두로 올렸다. 파시. 어떤 물고기가 많이 잡힐 때 어촌에 들어서 사람들이 북적대다가 그 물고기가 잡히지 않으면 쓰레기만 남기고 돌연 사라지는 비상설 어물전을 말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분신인 여동생 여정이 특사로 내려온 뒤였던 당시 상황을 비유해 현 장관은 “지금이 남북관계의 파시다. 오랜만에 큰 장이 선 것”이라고 말했다.
●롤러코스터 탄 한반도 정세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지금.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과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계기로 정점에 달했던 김정은의 2018년 대외 평화공세와 한반도 정세의 긍정적 전환은 당초 기대에 못 미치는 양상이다. 모든 면에서 실망스러운 싱가포르 북-미 정상 합의 이후 북-미간 비핵화 논의는 말 그대로 교착 상태다. 회담 전 “원샷으로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회담 직후부터 태도를 바꿨다. 7월 17일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비핵화에 제한시간도 속도도 없다. 프로세스가 진행될 뿐”이라며 김정은의 ‘단계적 동시적 해법’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은 많은 이들을 고민하게 만든다. 현재의 한반도 정세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현 전 장관이 말한 파시가 끝나버린 상황인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전후해 트럼프 행정부의 아마추어리즘이 드러나면서 북한 비핵화란 전략적 목표는 아예 물 건너 간 것인가? 아니면 북한 비핵화라는 대물을 거래하는 커다란 파시에 참가한 상인과 소비자들이 잠시 숨을 돌리고 더위를 식히며 더 큰 흥정을 준비하고 있는 시간인가? 그래서 지금은 칼 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설파한 ‘전략적 목표를 향한 전술적 휴지기’인가?
앞이 안 보일 땐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라고 했다. 북한이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2017년 7월 4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급 화성-14형을 발사한 직후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시작으로 출발한 화정 국가대전략 월례강좌. 싱가포르 정상회담 직후인 2018년 6월 마크 내퍼 주한 미 대리대사의 강연까지 1년간 강좌에 나선 연사 12명의 발언을 중심으로 현 상황을 복기해 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그 1년의 절반은 한반도에 전쟁 위기를 조성했던 북한의 전략도발국면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김정은이 대외에 전방위 대화공세를 폈던 기간이었다. 숨 가빴던 한반도 정세를 따라 한 달에 한차례 진행됐던 강좌에 나선 현인들의 발언들은 지금의 상황을 예견했거나, 지금의 상황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될 혜안으로 가득했다.
북한의 전략도발 국면 막바지였던 2017년 12월 11일 제6회 강좌에 연사로 나선 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은 김정은의 2018년 평화공세 가능성을 이렇게 예상했다. “김정은의 신년사에 어떤 내용이 담길 것 같으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북한이 핵무력을 완성해서 협상준비가 되었다고 하면 트럼프는 딜 메이킹의 천재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빅 딜을 생각할 수도 있다. 김정은이 미국과 핵국가 대 핵국가로 협상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던져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할지는 모르겠다.”
김정은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신년사 이후 두 달 만에 2018년 2월 연사로 나온 현 전 장관은 당시 “북한과 미국 간의 ‘큰 타협’이야말로 유일한 대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큰 타협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정교한 로드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한미가 충분히 사전에 협의해 심도 있는 논의를 해야 한다. 둘째, 협상 시간을 한정해야 한다. 협상을 과거처럼 2~3년 끌 수는 없다. 2~3개월이면 충분하다. 셋째, 기존의 제재 해제가 협상의 전제조건이어서는 안 된다. 제재는 계속하면서 가야 한다.”
●엉성한 로드맵, 북한에 끌려가는 미국
모두가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된 ‘큰 타협’이 나올 것으로 전망했고 기대했다. 하지만 7월 18일 현재 상황은 답답함을 넘어 암울할 정도다. 앞의 두 전제조건은 이미 싱가포르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4개항의 실천조항이 담긴 북-미 정상합의에서 우선 정교한 로드맵을 만들지 못했다. 한미간 합의도 없어 한국 정부조차 당황했다. 이후 북-미 비핵화 협상에서 미국은 북한에 질질 끌려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비핵화에 시한 없다” 발언은 김정은의 대책 없는 시간 끌기로 악화된 여론을 무마해보려는 군색한 해명처럼 들린다.
현 전 장관의 지적 중 오로지 마지막 조건만 살아있다. 협상의 조건으로 기존 제재를 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싱가포르 회담 직후인 6월 18일 열두 번째 연사로 나선 마크 내퍼 주한 미국대사 대리는 싱가포르 합의에 대한 대내외의 비판을 의식한 듯 이렇게 강조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강조했던 것처럼 북한 비핵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제재는 여전히 유효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과거와 달리 과정에 대한 단계적인 조치(제재해제 등 보상)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2018년 11월 중간선거, 2020년 11월 재선에 북한 비핵화 이슈를 활용하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인 접근에 대한 우려는 도발국면부터 있었다. 2017년 11월 27일 다섯 번째 연사로 나온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전 청와대외교안보수석비서관)의 지적이 대표적이다.
“한 가지 걱정은 트럼프가 완전한 비핵화(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enuclearization)를 공언하고 있고 지금은 결기가 대단해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입장이 약화될 가능성 높다. 임기가 있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이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자기 임기 내내 원하는 조건이 아닌 경우에는 계속 거부하면 된다. 트럼프가 시간이 흐를수록 입장이 약화되면 초조한 나머지 핵 동결로 타협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비핵화 공약 없는 동결 수용여부를 둘러싸고 한·미·일 공조체제가 위기를 맞을 수 있다.”
●과거 비핵화 협상 실패의 세 가지 이유
김정은의 현란한 대외적 이미지 정치 속에서 당장이라도 비핵화와 체제보장을 교환하는 ‘큰 합의’가 이뤄질 것으로 보였던 상황이 왜 갑자기 교착 상태에 빠진 것일까.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한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제시한 사람은 올해 4월 18일 열 번째 연사로 나온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었다. 그는 그동안 북한 비핵화 협상이 왜 번번이 실패했는지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먼저 북한의 비핵화 실패의 배경은 동북아라는 지정학에 원인이 있다. (비핵화된 북한의) 미래 비전에 대한 양국(미국과 중국)의 이해가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70년에 걸친 불신이다. 북한의 카드와 미국의 카드는 같은 종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이 무슨 핵을 갖고 있고 어떤 물질을 갖고 있는지 신고하고 폐기하고 검증하라고 요구한다. 이는 물리적으로 분명한 행동들이다. 그런데 북한이 미국에 요구하는 것은 다분히 절차적이고 제도적인 것들이다. 어느 누가 먼저 카드를 내놔야 한다. 그런데 북한은 미국에 대해 ‘뭘 믿고 내 목숨이 걸린 물건을 내놓겠느냐’고 하고, 미국은 ‘우리가 어떤 나라인데, 북한의 협박에 굴해서 먼저 양보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반복하면서 양측의 카드가 불신과 비대칭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세 번째로 북한과 미국의 국내 정치가 협상에 엄청나게 작용하고 있다. 1994년 미국과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에 경수로를 지어주고, 북-미 수교를 하고, 북한은 핵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서 당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김정일한테 편지도 썼다. 그런데 북한에서 핵 포기를 하기로 한 뒤 들고 나온 게 선군정치다. 북한 내의 반발 때문에 선군정치가 등장했다는, 그런 분석이 나와 있다. 북한 내에는 북한 정치가 있다. 미국은 또 어떤가. 클린턴이 합의한 것은 부시가 다 바꾸고 폐기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했던 것을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다 바꿨다. 국내 정치가 다 왔다 갔다 한다. 상대 입장에서 보면 약속을 하지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약속을 해도, (이를 뒤집는) 그런 국내정치가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1년을 통틀어 미중관계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더 컸다. 첫 연사였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그레이엄 엘리슨 교수가 ‘예정된 전쟁’이라는 저서에서 거론한 ‘투키디데스 함정’을 언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미중 양국을 숙명적으로 세계적 차원의 경쟁 관계로 보기 때문에 아태 지역에서 미중 패권 관계가 심해질 것이라 전망한다”고 말했다. 중국 전문가인 서진영 고려대 석좌교수(2017년 8월 22일 2회 강좌)는 “(베이징 하계 올림픽을 개최한) 2008년 이후 중국이 완전히 달라졌다. 목소리가 강해지고 터프해졌다. 영토와 주권과 관련해서 거칠게 나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북한이 국제사회에 대해 가지는 불신에 대해 윤영관 전 외교통상부장관(2017년 9월 28일 3회 강좌)은 “우리가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는 통일도 정권교체도 아닌 북한의 비핵화라는 정책 체인지임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핵을 포기한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당신들이 원해는 대로 해라’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보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김희상 한국안보문제연구소 이사장(2017년 8월 25일 4회 강좌)은 북한의 내부정치 문제를 근거로 “북한에 저런 체제가 존재하는 한 핵미사일을 폐기할 리도, 할 수도 없을 텐데 그 체제는 그대로 두고 ‘핵미사일 폐기’에만 매달렸으니 애초부터 가능할 리가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핵문제는 남한에 의한 통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므로 체제를 그대로 두고 북한 비핵화를 목표로 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이야기다.
이와는 달리 현 정권의 외교정책 브레인인 문정인 연세대 특임교수(2018년 5월 24일 11회 강좌)는 북한과 미국 모두 과거와는 다른 행동패턴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북한이 그러한 전술(과거와 같은 살라미 전술, 대화와 도발의 이중전술 등)을 추구한다면 이번 합의 전체가 위험에 빠지게 되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과거의 패턴과 죄와 벌의 반복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분명히 군사 행동과 전쟁 가능성을 키우면서 또 다른 위기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인지, 한국과 미국은 북한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고 북한은 이러한 과거의 관행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중략).
다행히 역사 속의 인물이 되고 싶어 하는 개인적 욕망과 국내 정치적 이유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미 정상회담을 성공으로 이끌고 싶어 할 것이다. 과거와 다른 파격적인 행보를 기대해 보는 이유다.”
●외교안보에 초당적 단합 필요
한반도 정세에 대한 분석과 전망이 엇갈리는 가운데 상황이 현재에 이른 데는 우리 모두의 책임, 특히 정치권의 과오가 크다는 자성론도 나왔다. 김형오 전 국회부의장(2018년 1월 23일 7차 강좌)의 일갈이다.
“우리가 북한에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정치의 책임이 가장 크다.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탕발림과 분홍빛 정책을 내세웠다. 미국만 믿고 동맹 조약 위에서 잠자다 보니 핵과 미사일 앞에서 생존을 위협 받게 됐다. 아직도 잠에서 덜 깬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여전히 걱정스럽다. 누군들 평화를 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북한의 말만 믿고 대비를 하지 않는다면 기울어진 운동장은 완전히 엎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향후 문제 해결에 있어서 정치권의 단합과 한목소리 내기가 중요하다는 것이 대부분 현인들의 결론이었다.
“여야 할 것 없이 외교안보에 있어선 초당적 단합이 필요하다. 솔직히 말하면 세계 언론이나 세계 사람은 한국의 정당을 안 본다. 무슨 당이 있는지도 모르고 오직 한국만으로 바라본다. 우리 모두 부강,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향해 힘을 합치자. 우리가 힘을 합치면 못할 것이 없다.”(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오늘 날과 같은 초비상 시기에 맞는 필요한 자세는 정치권의 단합이다. 모든 정치인들이 똘똘 뭉쳐서 외교적으로 기막힌 수를 내어도 될까 말까 한 상황이다. 국내 정치에 몰두해서 외교 문제를 놓고 싸운다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외교안보 부처가 긴밀히 협력하고 총체적으로 조율돼야 한다. 바깥에 나가는 메시지가 단일한 소리로 나와야 국민들의 신뢰를 받고 한국의 외교가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받을 수 있다.”(윤영관 전 외교통상부 장관)
현인택 송민순 전 장관은 강좌에서 “우리는 북핵문제에 운명이 걸려있는 당사자이므로 강대국들에 대해 우리가 할 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이 운전자론이건 무엇이건 말이다. 그런 연장선에서 굳건한 한미동맹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데 보수와 진보를 떠나 12명의 연사 대부분의 인식이 일치했다. 윤영관 전 장관은 “협상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한국의 이익이 철저하게 반영될 수 있게 상황을 만들어 가야 한다.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 아래 협상단계에서의 로드맵을 만드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많은 관찰자들이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서 협상의 주도권은 트럼프가 아닌 김정은이 쥐게 되었다고 우려한다. 굳건한 한미동맹이 교착된 북-미 회담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는 다음 1년의 화정 국가대전략 강좌를 통해 면밀히 지켜봐야 할 과제인 것 같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 연구위원·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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