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다음 달 10일 이후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열자는 데 원론적으로 합의하면서 멈춰 있던 비핵화 시계를 움직이기 위한 외교전이 재개되고 있다. 그러나 북측이 남북관계 개선을 막는 장애물을 해결해야 일이 순리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경고해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행이 녹록지는 않음을 시사했다. 북한이 ‘가을 회담’이라는 ‘궤도’는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경제협력 등 반대급부를 강하게 요구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北, 끝내 ‘회담 날짜’에 도장 안 찍어
13일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북측 수석대표로 나선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은 회담 말미에 “북남회담과 개별 접촉에서 제기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예상치 않았던 문제들이 탄생될 수 있고 또 일정에 오른 모든 문제들이 난항을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양측은 구체적인 회담 시기를 발표하지 못했다. 청와대가 전날 “회담 일시가 정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힌 것을 비춰볼 때 남북 간 적지 않은 이견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회담 사정에 정통한 외교 소식통은 “남북 정상이 만나서 논의할 의제와 향후 전망에 대해서는 의견이 비슷했지만 회담 전 거쳐야 할 과정에 있어서 생각이 달랐다”고 전했다. 정상회담 목표를 위한 선행 절차를 놓고 입장이 갈렸다는 이야기다. 리선권은 “일정에 오른 모든 문제를 진척시키는 데 있어서 쌍방 당국이 ‘제 할 바’를 옳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북측이 정상회담과 관련해 고심하고 있는 비핵화 관련 일정으로는 북-미, 북-중 간 대화가 꼽힌다. 회담 전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방북과 북-미 2차 정상회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 일정 등이 조율되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중재 역할을 자임한 우리 정부에는 남북경협 사업 속도를 저해하는 대북제재 완화와 종전선언에 대한 미국의 양보를 설득하라고 요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날 회담에서 북한의 비핵화는 원론적인 수준에서만 언급됐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북측 나름대로 비핵화와 관련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고, 우리는 북-미 간 진행되는 협상이 좀더 빨리 이뤄질 수 있게 해야 되고 남북관계가 북-미관계와 함께 선순환 구도를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고 논의했다”고 말했다.
○ 굳이 추석 앞두고 회담하자는 북한
이날 합의한 세 번째 남북 정상회담은 사실상 다음 달 중순 이후가 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9·9절(정권수립일) 70주년과 문 대통령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동방경제포럼, 유엔총회 참석 등을 피하면 남는 때는 14일부터 21일 사이다. 다만 동방경제포럼은 남북 정상이 모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우리 측은 문 대통령과 김정은의 외교 일정을 감안해 다음 달 14일 또는 17일을 회담 날짜로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북측은 유엔총회 참석 제안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추석 직전인 21일경 개최하기를 원한 것으로 전해졌다. 외교 소식통은 “북한은 외교 일정상 9월 중 회담이 가능한 마지막 날짜를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리선권은 이날 여러 차례 도발적인 발언들로 회담의 순조로운 성사 여부가 남측의 노력에 달렸다는 점을 강조했다. 리선권은 이날 회담 시작과 함께 “다 보는 데서 우리가 일문일답, 견해, 토론하면 기자들이 듣고서 잘못된 추정을 할 수 없을 것”이라며 회담 전체를 언론에 공개하자고 제안했다. 북측의 입장이 잘못 전달됐다며 그 책임을 남측에 돌리면서 비공개가 관례인 외교 회담을 다 공개하자는 갑작스러운 제안을 꺼내놓은 것. 조 장관이 “제가 수줍음이 많아 기자들, 카메라 지켜보는 앞에서 말주변이 리 단장보다 못하다”고 완곡하게 거절하자 “시대, 또 민족을 선도하자면 당국자들 생각이 달라져야 된다”며 훈수를 두기도 했다. 리선권은 또 회담 후 “기자 선생들 궁금하게 하느라 날짜를 말 안 했다. 날짜 (협의가) 다 돼 있다”고 말했지만 조 장관은 “잠정적 날짜는 없다”고 반박했다.
한편 워싱턴포스트(WP)는 남북 고위급회담 소식을 전하며 “남북 정상이 (올해) 세 번째 만남을 갖게 됐다”면서도 “북한 선전매체들은 최근 한국 정부가 대북제재에 동참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했다. 둘로 나뉜 한반도의 평화 프로세스가 부드럽게 진행되고 있다는 뜻만은 아니다”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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