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6일 공동으로 유엔에 제출한 판문점선언 영문 번역본은 청와대가 4·27 남북 정상회담 직후 발표했던 최초의 영문 번역본과는 큰 틀에서 차이가 없다. 영문 표현이나 단어들이 공식 외교문서에 맞게 좀 더 세심하게 다듬어진 정도다.
문제는 핵심 내용 중 하나인 종전선언 관련 부분이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 한글 원문은 물론 기존 번역본에서도 ‘적극 추진한다’고 돼 있었던 연내 종전선언이 ‘합의했다’로 바뀌어 버렸다. 193개 유엔 회원국들이 연내 종전선언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상황이다.
○ 북측 번역본에 가까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끝낸 뒤 내놓은 선언문의 3조 3항은 ‘남과 북은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이 되는 올해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고 돼 있다.
청와대도 당시 외신기자들에게 배포한 영문 번역본에서 ‘연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전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3자 혹은 4자회담을 적극 추진한다(actively pursue)’라고 그대로 번역했다. 이 번역본은 지금도 청와대의 외신 보도자료에 그대로 올라가 있다.
한 문장에 여러 내용이 들어있어 해석에 논란이 일자 백태현 통일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종전선언 등 문제는 남북만이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며 “3자 또는 4자 회담을 개최해서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종전선언은 전쟁 당사국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점에서 미국을 제외한 남북 양측의 동의만으로는 진행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정부도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유엔에 제출한 영문 번역본에서 ‘연내 종전선언에 합의했다(agree)’로 바뀌었다. 4월 정상회담 직후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 등 북한 매체들이 내놓은 영문 번역본과 거의 같다. 이 때문에 최종본에 북측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번역본에는 정부가 통상 ‘남과 북(South and North)’라고 써오던 표현이 ‘북과 남’으로 바뀌어 있는 부분도 발견됐다. 이에 대해 외교소식통은 “북측과 협의를 하면서 원문 취지에 최대한 충실하게 번역한 것으로 안다”며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 트럼프가 협상 카드로 쓰려던 종전선언을 벌써 합의?
이런 해석의 차이는 결과적으로 종전선언을 협상카드로 내밀며 북한의 비핵화를 압박하고 있는 미국의 협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구나 미국은 비핵화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남북이 종전선언을 먼저 하자는 데 강한 거부감을 표시해왔다. 북한의 핵 신고서 제출과 종전선언을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는 데다 제2차 북-미 정상회담도 추진 중인 시점이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정부가 유엔 회원국에 종전선언의 중요성을 인식시켜서 미국을 움직이겠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고 말했다.
조태열 주유엔 한국대표부 대사와 김인룡 북한 대사대리가 공동으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낸 최종 번역본은 유엔 사무국의 문서 편집 및 교정 절차가 끝나는 시점에 193개 회원국들에 문서로 회람된다.
논란이 일자 외교부는 “유엔에 제출된 판문점선언의 영문본은 남북이 합의한 국문본에 충실한 번역본”이라고 해명했다. 정부가 북한과의 합의를 바탕으로 연내 종전선언을 강하게 추진하는 만큼 내용상으로는 틀린 게 없다는 취지다. 정부는 또 청와대의 최초 영문 번역본이 ‘비공식(unofficial)’ 문서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두 달 뒤인 6월 발행한 남북 정상회담 결과집에도 그대로 이 번역본을 실었다. 유엔에 배포하기 위해 번역본을 다시 손대기 전까지 따로 정리해놓은 공식 영문 번역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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