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에 손 넣고 김일성 동상 촬영하다 ‘혼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28일 03시 00분


英배우 페일린 ‘北여행 다큐’ 화제
‘그리운 장군님’ 기상음악에 벌떡… 사람 거의 없는 평양공항에 깜짝
페일린 “북한은 변화를 원하지만… 주민 아닌 지도자가 원하는 방향”

평양 만수대에 있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 동상 앞에서 북한 여행 다큐 프로그램을 촬영하고 있는 영국 배우 마이클 페일린. 북한 체제하에서 주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이 다큐는 영국에서 방송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텔레그래프 홈페이지
평양 만수대에 있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 동상 앞에서 북한 여행 다큐 프로그램을 촬영하고 있는 영국 배우 마이클 페일린. 북한 체제하에서 주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이 다큐는 영국에서 방송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텔레그래프 홈페이지

“No. No. No.”

어디선가 쏜살같이 나타난 북한 관리들이 영국 배우 마이클 페일린(75) 촬영팀에 세 번이나 ‘안 된다(No)’는 경고를 날렸다. 평양 만수대 앞 김일성 김정일 부자 동상을 참배하던 페일린이 격식을 차리지 않은 분위기 속에 촬영하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던 것. 북한 관리들은 이 장면을 다시 찍으라고 명령했다. 북한 최고 존엄인 김씨 일가 동상 앞에서 불경한 행동을 하면 감옥에 가거나 추방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공손 모드’로 급전환한 페일린은 동상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촬영을 마쳤다.

27일 가디언, 텔레그래프 등 영국 언론에 따르면 코미디 시리즈 ‘몬티 파이선’ 출신의 유명 배우이자 여행가인 페일린은 2년여에 걸친 북한 정부와의 협상 끝에 5월 촬영팀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했다. 약 2주 동안 북한에 머물며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여행 다큐멘터리 2부작 ‘북한에서 마이클 페일린’(Michael Palin in North Korea)이 영국 현지에서 전파를 탔다. 20일과 27일로 나눠 방송된 이 다큐에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코미디 배우인 페일린이 통제사회 북한의 수많은 규율을 지키려고 애쓰는 상황들이 재치 있으면서도 교훈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다큐를 방송한 지상파 민간방송 ‘채널5’는 “‘리얼리티쇼를 줄이고 이런 퀄리티(양질) 프로그램을 늘려 달라’는 시청자들의 주문이 폭주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에서는 이 프로그램의 판권을 따내기 위한 방송사 경쟁이 벌어진 끝에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이 다음 달 초 방영할 예정이다.

다큐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다수 등장한다. 오전 5시부터 최강 볼륨으로 평양 시내에 울려 퍼지는 북한 주민 기상곡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나는가 하면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일반 공항과는 달리 평양 공항에는 거의 사람이 보이지 않아 ‘귀신공항’(ghost airport)이라고 별명을 붙이는 장면도 나온다.

평양 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는 어린 학생이 김씨 일가를 칭송하는 시를 낭독해 페일린이 북한 체제 우상화를 느꼈다고 고백하는 장면도 있다. 북한에서는 70대 중반인 자신을 완전 노인 취급한다고 툴툴거리는 장면도 재미있게 그려졌다. 그런가 하면 북한에서 75세 생일을 맞은 페일린이 감시인 2명으로부터 축하 케이크를 받고 감격하는 모습도 있다. 그가 주민들과 어울려 노동절(5월 1일) 행사에서 춤을 추는 장면도 있다.

페일린은 다큐 방송 전 런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처음에는 북한 주민들이 아무런 감정 없는 로봇 같아 보였는데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과 친해졌다”고 말했다. 북한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 대해서는 “나는 코미디언이라 잘 모른다”고 운을 뗀 뒤 “북한은 변화를 원한다. 그런데 그 변화가 주민들이 아닌 지도자가 원하는 방향인 듯해서 걱정이 된다”고 밝혔다.

북극, 히말라야 등에서 각종 탐험을 완수한 페일린은 “약 2주 동안 코카콜라와 인터넷이 없는 세상에서 살았다”며 “그렇지만 북한에 다시 갈 수 있다면 가고 싶다. 주민들이 나를 따뜻하게 맞아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미경 전문기자 mickey@donga.com
#마이클 페일린#북한#여행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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