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4·27 판문점 선언과 이의 국회 비준 동의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은 정부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의 정쟁 같지만 국제정치학의 오래 된 패러다임 또는 사조 간 갈등의 사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적대적인 국가들이 대화와 신뢰 구축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이상주의와, 구조적 무정부상태를 특징으로 하는 국제정치 하에서 평화란 전쟁과 전쟁 사이의 기간일 뿐이며, 상대방에 대한 힘의 우위만이 평화와 안보를 지킬 수 있다는 현실주의가 그것입니다. 질문에서 제기한 ‘대북정책의 연속성’은 전자를, ‘변화하는 국제정치 현실 속에서의 유연한 대응’은 후자를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선 정부와 여당은 4·27 판문점 선언의 국회 비준 동의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촉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비핵화를 통해 경제개발에 나설 진정성이 있으며 그 진정성을 키워가도록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는 전제 하에 북한 비핵화에 따라 남한 정부의 대규모 지원과 관계 개선을 약속한 판문점 선언을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비준 동의하는 것은 그만큼 북한에 비핵화 인센티브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11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의 통일부 대상 국정감사에서 “판문점 선언의 비준동의를 통해 북한과 협상을 촉진할 수 있고, (비준동의는)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도 더 큰 교섭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북한이 비핵화를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구조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국과 미국 등 민주주의 주변국의 정권교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선거를 통해 정권이 바뀌면 대북정책이 바뀌고, 현 정부와 나눈 대화와 합의가 종잇조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북한이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0년 6·15공동선언과 2007년 10·4 정상선언이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지켜지지 않는 것을 본 북한이 이를 포함한 모든 남북한 합의의 이행을 선언한 판문점 선언의 국회 비준동의를 원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미국에 대해 조기 종선선언을 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 논리일 수 있습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대외부총장은 “그동안 역대 정권이 정권 차원의 대북정책을 실행해 왔다고 비판을 받았다. 지금이야말로 대북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 투명성이 필요한 때”라며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재정이 투입되는 사안에 대해서 남북관계발전법에 따라 매년 들어갈 비용에 대해서 국회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꼭 필요한 민주적 절차”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더 거시적으로 보면 우리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지킨다, 남북한 평화통일의 길을 우리가 주도한다는 측면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같은 민족간의 관계임과 동시에 갈등하는 두 국가간 관계임을 감안할 때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국익을 생각한다면 상대방의 말이 아니라 행동, 의도가 아니라 처한 상황을 보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신조를 따르는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지금 단계에서의 판문점 선언 국회 비준동의는 불확실한 북한 비핵화에 대해 확실한 양보와 보상을 국민의 이름으로 확약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 여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아직 구체적인 행동으로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지금 비핵화의 의지가 있더라도 그 의지는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핵·미사일 개발에 몰두하느라 재래식 군비와 경제 등에서 취약한 북한이 과연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는데 요긴한 ‘보검’이라고 스스로 주장해 온 핵을 과연 포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 큽니다. 이를 정치적으로 밀어붙이는 정부의 태도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습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선언이 약속한 북한 지원에 천문학적인 재정이 투입될 수도 있는데 국회 내에서 충분한 숙의 과정 없이 비준동의를 요구하는 것은 민주적 절차에 위배된다”고 지적했습니다.
강경화 외교부장관의 5·24조치 완화 가능성 발언을 놓고 나라 안팎에서 비판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 국회 비준동의 건 역시 한미 대북제재 공조를 해치고 한국만 앞서가려한다는 미국 측의 우려를 낳을 수 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구체적인 비핵화 로드맵을 내놓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비핵화 진전에 따른 대규모 양보와 보상 제공하는 남북관계 진전 로드맵을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 센터장은 “북한이 핵·미사일 신고서를 제출하거나 포괄적인 사찰을 허용했을 때 등가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맞다”고 제안했습니다.
이같은 시각은 힘이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엄연한 현실과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북한의 스스로 제시하고 있는 정상국가화로의 바람직한 미래는 한국보다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의 이해관계와 정책 등에 더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한국이 앞서가며 카드를 써버릴 것이 아니라 북한의 보다 확실한 비핵화 행동을 유도하는 인센티브로 아껴 두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논쟁 속에서 바른미래당이 국회 비준동의에 부정적인 당론을 내놓으면서 여권도 국회 비준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여당은 판문점 선언의 정당성을 지지자들에게 홍보하고 야당에 대한 여론 공세에 활용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이해관계자인 김정은 위원장도 청중일 수 있습니다. 정부 여당은 최대한 노력했지만 야당의 반대로 비준에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설득을 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최근 움직임들은 국제정치적인 패러다임 논쟁일 뿐 아니라 지극히 국내정치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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