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비핵화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북한이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해상에서 선박을 이용해 정제유, 석탄 등 금수품목 밀거래를 계속해 왔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7일(현지 시간) 폭로했다. 같은 날 미 법무부도 북한 금융기관의 돈세탁에 연루된 외국 기업 3곳의 자금을 몰수해 달라는 소송을 미 연방법원에 제기했다. 북한과의 고위급회담을 앞두고 협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미국이 대북 압박을 본격화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WSJ는 유엔의 기밀자료와 미국 관리들을 인용해 올해 북-미 정상회담 및 남북 정상회담 개최로 화해 무드가 조성됐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1월부터 8월 중순까지 20여 척의 유조선으로부터 148차례에 걸쳐 정제유를 불법적으로 넘겨받았다고 밝혔다.
현재 북한은 석탄, 섬유, 해산물 수출이 전면 금지돼 있으며 정제유는 제한 쿼터만 수입이 허용돼 있다. WSJ는 이 유조선들이 적재 용량을 다 채웠다면 대북제재가 허용하는 상한선인 연 50만 배럴의 5배에 달하는 250만 배럴의 정제유가 북한에 흘러갔을 것으로 추산했다. 그러면서 올해 북한의 휘발유 가격이 비교적 안정세를 보인 것도 선박 대 선박 환적(옮겨 싣기) 방식으로 연료를 계속 공급받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현재 유엔과 관련 당국은 최소 선박 40척과 130개 기업에 대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WSJ는 유엔 소식통을 인용해 이들 선박과 다른 화물선들이 거의 200건에 달하는 정제유, 석탄 불법 환적 혐의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 선박이 모두 북한 소유인지는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다만 선박이 등록된 곳이 대만, 토고(아프리카) 등 광범위한 지역에 퍼져 있다.
WSJ는 북한의 선박을 이용한 제재 회피 수법으로 △세관서류 위조 △선박 이름 위장 △자동식별장치 끄기 △해상 신호 조작 △모니터상 다른 나라 선박으로 오인하게 만들기 등 5가지를 제시했다. 신문은 이 중 자동식별장치 끄기가 가장 널리 사용된다면서 후아푸(Hua Fu)호를 대표 사례로 소개했다. 후아푸호의 원래 이름은 홍콩 ‘창안해운 테크놀로지’ 소속의 ‘창안호’였다. 이 배는 지난 2년간 4개 국적의 깃발을 바꿔 달고 수십만 달러 상당의 북한산 석탄을 제3국으로 실어 날랐다. 미 캘리포니아 소재 미들베리 연구소의 북한 전문가 안드레아 버거 연구원은 “북한은 자신들의 교과서에 나와 있는 모든 제재 회피 수법을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미 법무부는 27일 북한 금융기관의 돈세탁에 연루된 싱가포르 기업 1곳과 중국 기업 2곳의 자금을 몰수해 달라며 미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몰수 요청 규모는 이름이 공개되지 않은 싱가포르 기업이 59만9930달러, 홍콩에 본부를 둔 ‘에이펙스 초이스’는 84만5130달러, 또 다른 중국 기업 ‘위안예 우드’는 172만2723달러로 모두 316만7783달러(약 35억7500만 원)다.
법무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들 기업이 미국 달러를 이용해 제재 대상 북한 은행들과 거래를 했다면서, 북한 은행들은 이런 방식을 통해 북한 정권에 필요한 물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이들 북한 은행이 세탁된 자금을 이용하면서 미국의 금융 시장에도 불법적으로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법무부가 공개한 소장에 따르면 싱가포르 기업과 에이펙스 초이스는 북한의 위장회사를 통해 과거 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실(OFAC)이 제재한 ‘벨머 매니지먼트’ 등과 자금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북한 정권과 거래했다. 위안예 우드도 북한의 위장회사와 함께 ‘단둥 즈청금속회사’와 ‘위총 주식회사’ 등과의 거래에 여러 차례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다. 위총 주식회사는 북한과의 불법 거래 등으로 미 정부의 제재 명단에 올라 있고, 단둥 즈청금속회사는 유령회사를 동원해 북한산 석탄을 수입한 혐의로 이미 408만 달러에 대한 몰수 소송이 제기된 회사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