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북측 개성 판문역에 반질반질한 회색빛 콘트리트 침목이 등장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검은색 유성펜으로 침목 위에 ‘함께하는 평화 번영, 함께하는 남북 철도, 도로 연결’이라고 적었다. 김윤혁 북한 철도성 부상은 ‘동·서해선 북남철도 도로련결 및 현대화 착공식을 기념하며’라고 눌러 적었다. 한때 대북 제재망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던 남북 철도 착공식이 유엔 제재 면제 승인을 받고 우여곡절 끝에 이날 열린 것이다.
○ 25분 만에 끝난 착공식
이날 오전 10시 열린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은 비교적 조촐했다. 간이 단상에 남북 귀빈 12명이 앉았고, 이를 마주 보고 남북 참석자 200여 명이 플라스틱 간이 의자에 옹기종기 앉았다. 행사도 단출했다. 착공사, 침목 서명식, 궤도 체결식(침목을 조이는 행사), 도로표지판 제막식, 북측 취주악단의 기념 공연이 25분간 이어졌다.
김윤혁 부상은 착공사에서 “북남 철도·도로 사업의 성과는 우리 온 겨레의 정신력과 의지에 달려 있으며 남의 눈치를 보며 주춤거려서는 어느 때 가서도 민족이 원하는 통일열망을 실현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북남 철도·도로 협력의 무진장한 동력도 민족 내부에 있고 전진속도도 우리 민족의 의지와 시간표에 달려 있다”고 했다. 비핵화와 국제사회의 제재 등과 연결시키지 말고 ‘우리민족끼리’ 철도·도로 연결에 속도를 내자는 것이다.
김 장관은 철도·도로 연결을 통해 “물류비용을 절감하여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더욱 높이고, 이를 통해 얻은 경제적 편익은 남과 북이 함께 향유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분단으로 대립하는 시대는 우리 세대에서 마무리돼야 한다”면서 “담대한 의지로 우리 함께 가자”고 했다. 철도 연결을 통한 북한 경제 발전의 미래상을 제시한 셈이다.
이날 착공식에는 중국, 러시아, 몽골 등의 고위급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광복절에 제안한 동아시아철도공동체 구상에 포함되는 국가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추궈훙(邱國洪) 주한 중국대사는 “이번 착공식으로 남북 관계에 큰 진전을 이루게 됐다”며 “남북 관계가 평화와 비핵화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안드레이 쿨릭 주한 러시아대사는 “남북 철도 연결은 유라시아로 연결된다. 서울에서 모스크바까지 갈 수 있어서 관심이 있다”고 했다. 다만 사업 참여에 대해선 “좀 검토를 해봐야 한다”며 말을 아꼈다.
○ 착공식은 내년 비핵화 협상의 마중물 의미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남북 정상이 합의한 ‘연내 착공식’ 약속은 지켜졌지만 실제 공사가 언제 시작될지는 불투명하다. 문 대통령 또한 1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마치고 뉴질랜드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실제로 착공 연결하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국제 제재에 저촉될 소지가 있다”며 “착공이 아니라 어떤 일을 시작한다는 하나의 ‘착수식’이라는 의미에서 착수식은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한 바 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이날 행사 뒤 “착공한 건 아니고 착공식 행사를 했다”며 웃었다. 실제 철도가 깔리고 열차가 지나가려면 북한의 가시적인 비핵화 조치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게 외교가의 중론이다.
이런 까닭에 이날 착공식은 교착 상태가 장기화되고 있는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을 이끌 마중물 성격이 강하다는 평가가 많다. 21일 한미워킹그룹회의에서 연내 착공식 개최에 한미가 공감대를 형성한 데 이어 24일 유엔 안보리에서 제재 면제 조치를 받은 배경이기도 하다.
이날 남북 고위급 회담 대표인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10월 15일 고위급 회담 이후 두 달여 만에 만났다. 조 장관이 21일 방한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면담한 것을 감안하면 미국 쪽 기류를 리 위원장에게 전달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가운데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이 이날 행사장 한편에서 조평통 인사에게 대화를 촉구하는 말을 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박 의원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답방을 하고 비핵화하겠다는 ‘서울 선언’을 해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대화에 나서라고 해야 한다. 그럼 미국 여론도 달라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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