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특파원 3년 임기를 마치고 귀임하기 직전인 2015년 10월 3일. 현지 대학 동문회 선배들의 요청을 받아 북한의 미래를 주제로 특강을 했습니다. 북한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범주를 설명 하고 미래의 관찰과 판단은 개인의 몫으로 맡긴 뒤 우아하게 끝맺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북한이 끝까지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라는 질문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은 그해 여름 휴전선 목함지뢰 사건으로 빚어진 남북 군사 충돌 위기를 대화국면으로 전환시켜 남한, 중국 그리고 미국을 상대로 한 대대적 평화공세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지금 보면 다음해부터 핵무력 완성국면을 시작하기 위한 ‘위장평화공세’였습니다. 미국 교민이 대부분인 동문들도 종국에는 북한이 핵을 가지려 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매우 현실적인 판단었던 셈입니다.
“북한은 이미 세 차례(2006, 2009, 2013년) 핵실험을 하고 수차례 미국 본토를 겨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실험을 했습니다. 북한은 체제수호의 보루라며 대를 이어 개발해 온 핵능력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미국도 이미 가져버린 핵능력을 어찌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남한과 국제사회의 비핵화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지만 만의 하나, 그 경우 세상은 어떻게 되느냐. 그건 핵을 든 북한이 앞으로 주변국들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핵을 들고 주변국을 위협하는 악당 짓을 계속 할 것이냐, 아니면 핵을 들었지만 착한 정상국가로 살아갈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북한이 핵을 들고 한국에 핵공격 위협을 하고, 미국과 군사대결 국면을 조성하면 북미관계나 남북관계 진전은커녕, 한반도에 큰 불행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핵을 든 북한이 남한과 국제사회에 해코지를 하지 않고, 완전히 달라진 선한 국가로 이미지를 정착시킨다면 먼 훗날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남북관계가 진전될 지도 모릅니다. 물론 남한도 북한의 핵에 대비를 한 상태이겠고, 그런 상태로 많은 시간이 흘러야 결과를 알 수 있겠지요.”
우려했던 대로 북한은 2016년 1월 6일 4차 핵실험을 시작으로 2년 동안의 핵무력 완성국면을 연출했습니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국제사회를 상대로 전방위적인 평화공세를 벌였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세 차례 정상회담을 발판 삼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 시진핑 국가주석과의 세 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국제적인 고립에서 탈피하고 핵무기를 내려놓은 정상국가의 길을 가는 체 했습니다.
하지만 1일 신년사에 나타난 김정은의 이중적인 발언과 8일 북중 정상회담에서 울려퍼진 양국 밀월 강화의 세레나데를 보면 불행하게도 3년 3개월 전 워싱턴 동문들에게 말했던 대로 문제가 흘러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특히 양국은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정세 관리와 비핵화 협상 과정을 공동으로 연구·조종해 나가는 문제와 관련해 심도 있고 솔직한 의사소통을 진행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양국이 한 몸처럼 머리를 모으고 입을 맞추겠다는 것을 선언한 것으로 지난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기한 ‘중국 배후론’이 사실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꼴입니다.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밝힌 ‘새로운 길’에 대해 시 주석과 논의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국 내에서 북한이 미국 본토를 겨냥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폐기 카드를 다시 만지작거린다는 희망 섞인 관측이 지난해에 이어 다시 나오고 있지만, 단거리 중거리 핵미사일의 조준경 하에 놓인 한국과 일본에게는 미국이 ICBM 폐기를 받고 대북 제재를 완화시켜주는, 그래서 북한이 주변국을 볼모로 잡은 어정쩡한 핵보유국이 되는 경우가 오히려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최근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북한이 ‘핵을 가진 평화(nuclear peace)’를 명분으로 핵 보유 굳히기에 노골적으로 나선 것이라는 우려에 힘이 실리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북한은 핵을 들고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을 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꿈이 현실화 될 동안은 중국이 제공하는 생명선에 의존해 낡은 수령 절대주의 체제를 지키려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북한이 과연 핵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악당화 되어있는 자신의 대외적인 정체성을 바꿀 수 있느냐 입니다. 언제까지일지 모르는 오랜 시간을 곰처럼 인내하며 지금까지 보여준 악당 행태를 참아내느냐 아니면 핵을 가진 악당의 본성을 드러내느냐에 따라 동북아 정세는 물론 북미관계와 남북관계 진전의 실마리가 생기느냐 아니냐가 판가름 날 것입니다. 북한이 종국적으로 비핵화의 길을 가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짧아도 30년은 될 것으로 보이는 그 지난한 과정에 악당의 이미지를 벗고 정상국가로의 이미지를 심느냐, 마느냐가 비핵화 이후 북한의 미래를 결정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국제정치학 이론에 대입해 말하면 구성주의 학파가 중요시하는 ‘정체성과 무정부상태의 사회적 맥락과 의미’의 문제에 해당합니다. ‘국제정치의 사회적 이론(Social Theory of International Politics)’이라는 책으로 구성주의의 대표적 학자가 된 알렉산더 웬트 교수는 국제체제가 무정부적이며 안보딜레마에 빠진 국가들이 생존을 위해 권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주의의 가정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무정부적인 국제체제에서도 국가들은 동일한 정체성을 갖지 않으며 체제를 구성하는 국가들의 정체성에 따라서 국제적 무정부 상태의 사회적 맥락과 의미가 달라진다고 보았습니다. 국제체제를 구성하는 국가들의 정체성에 따라 국제체제의 의미가 결정되며, 동시에 국체체제의 의미는 개별 국가의 정체성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국제정치학에 사회학을 접목한 이 주장은 영국과 북한의 핵을 비교한 다음과 같은 설명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상대 국가와의 관계에 따라 동일한 무정부적 국제체제라고 해도 의미가 달라진다. 웬트가 자주 사용하는 사례는 바로 영국과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의 대조적인 의미이다. 영국의 핵무기가 북한의 핵무기보다 보유 숫자나 파괴력의 측면에서 더욱 강력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영국의 핵무기보다 북한의 핵무기를 더욱 위험하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차이는 영국과 북한 핵무기의 물질적인 측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오직 영국과 북한이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낸 사회적인 맥락과 더불어 영국과 북한 핵무기의 의미에서 비롯된다.”
이근욱, 『왈츠 이후: 국제정치이론의 변화와 발전』(서울: 한울, 2009), 241쪽.
북한이 미국의 제제와 압박 속에서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안으로부터 바꿔낼 수 있을까요? 구체적으로 김 씨 일가의 신정화 된 독재정치. 즉 수령 절대주의 독제체제의 내적 긴장과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대외 도발을 하고 불법적인 방식으로 외화조달을 하는 나쁜 버릇을 고칠 수 있을까요? 그 결과 영국처럼 핵을 가졌지만 국제사회의 지도국이자 건전한 일원으로 이미지를 탈색하기까지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요?
냉정한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에서는 ‘그것은 알 수 없는 일’로 치부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야 ‘그렇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래서 그렇게 될 때까지 우리는 북한이 들고 있는 핵능력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 그에 맞게 능력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북한의 말만 믿고 마치 북한이 핵은 들었지만 정상국가가 된 양 대응하다간 미래 세대가 큰 화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기성세대는 잊으면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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