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목적은 한국전쟁이 한국의 정치적 이념 지형을 보수화 시켰으며 극우화의 가속제 내지는 증폭제가 되었다는 추상적 수준의 논의를 실증적으로 검증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한국전쟁 전후 헌법제정 및 개정 내용과 주요 선거 결과를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서독의 상황과 비교함으로써 한국전쟁의 영향력을 파악하고자 한다. 헌법제정 및 개정이 신생 정부인 대한민국과 서독이 각기 어떠한 이념적 지향을 갖고 국가를 운영하고자 했는지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선거 결과는 이러한 국가의 의도에 어느 정도로 유권자들이 동조했는지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첫째,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서독과 한국에서 있었던 헌법 제정 및 개정은 냉전 초기 양 정부가 어떠한 이념적 지향성을 바탕으로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는지 파악하는 자료가 된다. 실질적으로 이러한 법적, 제도적 조치가 어떠한 효과를 가져왔는지와 별개로 당시 냉전의 형성이라는 국제정세와 사회경제적 문제 해결이라는 국내적 요구에 직면하여 설정한 국가운영의 방향을 살펴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1950년대 내내 한국과 서독 모두 이념적 보수화가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독의 경우 정부 수립의 단계에서부터 제한요인으로 인해 국가의 권한 및 국민의 기본권이 상당 부분 축소되었다. 하지만 냉전의 악화로 인해 소련의 위협에 대한 서유럽의 공동 대응 필요가 높아짐에 따라 기본법 개정을 통해 국가의 권한은 상당한 수준으로 회복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재무장화 등으로 인해 국민의 기본권은 더욱 침해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반공주의를 위해 나치에 부역한 세력을 복원하고 우경화를 시도한다는 비판이 사회주의를 포함한 진보적 세력으로부터 가능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의 경우 서독과 달리 제헌헌법은 적극적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사회적 경제주의 내지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담았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두 차례의 헌법 개정을 거치며 기존 제헌헌법의 다원적, 진보적 가치들은 폐기되고 미국의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체체로 일원화 되었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전후복구를 위한 원조경제가 최우선시 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한 결과였으며, 전쟁을 거치며 확대된 미국의 영향력 하에서 정치적 이념 지향 역시 보수화 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의 제약 하에서 출발은 차이가 있었지만 두 국가 공히 1950년대 국가 운영에서 비슷한 수준으로 이념적 보수화와 우경화를 겪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진보적 성격을 고려했을 때 한국의 보수화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지만 결과적 차원에서 유사한 수준으로 수렴하였으며 이는 한국전쟁을 포함한 당시 글로벌 차원의 냉전 악화라는 국제정치의 질서 속에서 공히 규정된 바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반공주의와 관련한 정치적 사건에서 한국이 훨씬 우경화 정도가 심했다고 볼 수 있지만 서독 역시 공산당 불법화 등의 반공 사건을 경험하였으며 한국의 경우 한국전쟁 이전 주요 사건과 연결지어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한국전쟁 이전과 이후 서독과 한국에서 실시된 주요 선거 결과는 헌법 제정 및 개정과 같은 정부가 주도한 제도적 차원의 보수화에 상응하여 당시 유권자의 실질적인 이념적 보수화가 어느 정도까지 동조했는지 확인하는 자료가 된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을 경험한 한국의 유권자가 서독의 유권자에 비해 이념적 보수화에 더욱 적극적으로 동조하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서독의 경우 초기 연방의회 선거부터 지속적으로 기민당 중심의 보수적 정당의 강세가 이어졌다. 이는 유럽에서 냉전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소련과 동독 공산당의 공격적 대서방 전략에 대한 아데나워의 재무장을 포함한 강력한 반공주의 노선이 유권자의 지지를 얻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기민당이 주도한 이념적 보수화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내내 사민당이 일정 수준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1961년 선거에서 단일정당으로 최다의석을 확보한 점은 서독 정치 내에 진보적 정치세력의 공간이 확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역시 서독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이전부터 정부 주도로 이념적 보수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거치며 유권자 수준에서 반공주의에 호응하는 정도가 서독과 판이하게 달라졌다. 즉 전쟁 이전부터 4.3사건이나 여순사건 등으로 인해 진보적 정치세력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전쟁은 공산주의의 폭력성을 그대로 노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정부가 주도한 반공주의가 실체를 갖데 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 정치의 이념적 지형은 일방적인 보수화로 귀결되었으며 진보당 사건 등을 통해 진보적 이념은 공식 영역에서 사실상 금기시 되었다. 즉 한국전쟁은 유권자가 정부 주도의 반공주의에 소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4.19의 좌절을 경험하며 반공을 목표로 내세운 5.16 쿠데타를 묵인하는 결과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정부가 주도한 이념적 보수화에 대한 유권자의 호응 정도에서 양국이 차이를 나타내는 이유는 전쟁을 경험한 한국의 유권자가 그렇지 않은 서독의 유권자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이념적 보수화에 동의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서독의 경우 기민당 정부 주도의 강한 반공주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사민당 일정 수준의 지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한국의 선거 결과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사민당과 같은 진보적 정치 세력이 거의 전무하였으며 자유당, 민주당 등 이념적으로 보수화를 내건 정당 위주로의 권력 구도가 완성되었다. 즉 한국전쟁에서 공산주의에 의한 물리적 폭력의 경험은 정부가 주도하는 반공주의에 자발적으로 동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유권자의 이념적 보수화를 강화시켰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결국 한국전쟁은 냉전의 악화라는 국제정세에서 반공주의를 내세운 정부 정책에 대한 유권자의 동조 정도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한국 정치의 이념적 보수화를 가속 내지 증폭시켰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유권자 수준에서의 강한 동조는 제도적 차원의 반공주의와 맞물려 강력한 재생산 구조를 만들어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이념적 보수화를 지속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결론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으로 이론적 연구와 더불어 미시적 차원의 연구가 병행될 필요하다. ‘영향’이라는 개념 자체를 지표를 통해 실증하는 것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문화사, 구술사 등의 작업을 통해 구체적인 근거들을 발굴하는 것이 유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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