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북한과 합의 가능성 크다” 그러나 비핵화 목표에 대해서는…[신석호 기자의 우아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4일 08시 27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의 설 연휴 기간 중인 3일(현지 시간) 방송된 CBS방송의 ‘페이스 더 네이션’ 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나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비핵화에) 합의할 가능성도 매우 크다. 김정은은 북한을 엄청난 경제 대국으로 만들 기회를 가졌다”고 이달 말로 예고된 2차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습니다. 그는 ‘미군을 한국에 계속 주둔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다른 이야기는 한 번도 안했다”며 주한미군 철수 논의가 없었음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미국의 소리 방송(VOA) 방송이 과거 발언을 날카롭게 분석한대로 그는 북한과의 대화 가능성과 성과를 강조하는 것에 비해 자신이 원하는 북한 비핵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습니다.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 역시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직전인 지난달 31일(현지 시간) 미국 스탠퍼드대 강연 이후 한국 전문가와 특파원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북한 비핵화’의 목표에 대해 중요한 언급을 했습니다. ‘미국과 북한이 비핵화라는 단어의 의미를 공유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 비핵화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나 상호 합의는 없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국제법이 요구하는 바에 부합하도록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전체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대량살상무기의 생산 수단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같은 운송수단의 제거도 포함된다. 그러나 무엇이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이고, 무엇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인가에 대한 구체적이고 합의된 정의는 없다(연합뉴스 1일자 보도).”

이에 대해 북핵 문제 전문가인 전성훈 아산정책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정상회담이라는 열차가 종착역도 합의가 안 된 채 달린다는 얘기”라며 “이달 말로 거론되고 있는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어설픈 합의가 된다고 해도 최종 목적지(비핵화의 목표)가 명시되지 않으면 북한의 핵 보유는 기정사실화 될 것이다. 비건의 발언이 그런 우려를 더 크게 만들었다”고 우려했습니다. 바로 비핵화 협상의 목표가 명확하지 않거나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
앞서 이보다 더 한 발언도 있었습니다. 북한 비핵화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현장 사령관인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달 11일(현지 시간)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과) 어떻게 미국 국민에 대한 위협을 줄일 수 있을지를 논의하고 있다. 궁극적인 목표는 미국인의 안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비록 “완전하고 최종적인 비핵화에 도달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긴 했지만 미국이 완전한 비핵화는 불가능한 것으로 단념하고 미국 본토와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능력 폐기 정도로 만족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에 불을 지폈습니다.

지난해 북한 비핵화를 위한 북미협상이 시작된 이후 미국이 제시하는 협상의 목표(objective)를 중요하게 보아왔습니다. 목표에 의한 경영(MBO)이라는 용어가 있는 것처럼 목표는 인간의 모든 활동의 지향점이 되는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캄캄한 밤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배가 멀리 희미하게나마 등대를 보고 달려가면 살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난파되어 침몰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물며 북한의 비핵화라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과 국제사회가 어떤 목표를 내걸고 추구하는지는 협상의 성과를 좌우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00년대 프로이센의 전쟁 철학자이자 전략론의 대가인 칼 폰 클라우제비츠(C. V. Clausewitz)는 전쟁 목적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에서나 경영에서나 일반적으로 모든 목적이나 목표는 구체적이고 명확하고 제한적이고 실현가능해야 합니다. 이런 구체성과 더불어 중요한 것이 일관성입니다. 전쟁의 와중에 전쟁의 목표를 자주 바꾼다면 그 전쟁은 이길 수가 없다는 게 역사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미국의 치욕스러운 패전 사례이자 이후 미국 내부를 크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던 베트남전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패전 이후 미군의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월맹군이 ‘월남 정복’이라는 단순하고 일관된 목적을 추구하는 사이 미국의 전쟁목표는 명확하지도 않았고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하며 변해갔습니다.

네브라스카대 휴 아놀드 교수가 1975년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1949년부터 1967년까지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미국이 공표한 군사적 작전의 명분이나 목표는 모두 21가지나 되었다고 합니다. 1949년부터 1962년까지는 공산주의의 침략을 막는다는 거대하고 이념적인 목표가 제시됐다가 1962년부터 1968년까지는 반(反) 게릴라전이라는 베트남 내부 문제 차원의 목표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다 군사적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자 1969년부터는 ‘미군의 안전한 철수’가 전쟁의 목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북한 비핵화라는 전쟁에서 미국은 다시 베트남전의 우를 범하면 안 될 것입니다. 이미 미국은 2000년대 초반 집권 공화당 의회에서 만들어 낸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 비핵화(CVID)’라는 목표를 내걸었다가 슬그머니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라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버전으로 바꾼 전력이 있습니다. 용어는 좀 다르지만 어쨌거나 김정은이 밝힌 완전한 비핵화라는 설명으로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페이오 장관이 제기한 ‘미국인의 안전’이라는 단어는 CVID나 FFVD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목표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이 미국인의 안전인가? 목표가 요구하는 구체성이나 명확성, 제한성과 실현가능성을 모두 결여하고 있을뿐더러 일관성까지 훼손하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될 2차 북미협상에서 국제사회는 양국이 지향하는 비핵화의 목표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달라지고 흔들리는지 면밀히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CVID나 FFVD가 과연 제한적이고 달성가능한 목표인가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작 협상을 1년 해보고 목표를 바꾼다는 것은 강대국 미국답지 않습니다. 만일 전쟁 중에 목표를 이리저리 바꾸다가 북한을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채 제재만 허무는 결과에 이른다면 그것은 아마도 베트남 전쟁 패배에 버금가는 미국 외교사의 치욕이 될 것입니다.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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