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 정책 특별대표가 3일부터 10일까지 7박 8일 일정의 서울-평양-서울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성과가 적지 않았습니다. 일단 27~28일 베트남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2차 정상회담 일정을 잡는데 성공했습니다. 북한이 원하는 하노이로 결정된 것으로 볼 때, 비핵화 조치에 대해 평양의 진전된 약속이 있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합의 내용은 나오지 않고 있고, 비건 대표와 김혁철 북한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와의 추가 실무회담에서 구체적인 것이 결정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미국 조야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협상술에 미국과 동맹국의 이익을 넘어선 타협을 할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평양에서 비건이 풀려고 한 숙제들은 무엇이었을까요. 방한 직전이자 그의 취임 첫 공개행사였던 지난달 31일 미 스탠퍼드 강연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현장에 있던 김정안 특파원이 자세한 내용을 복기했습니다.》
영상 20도를 육박하는 화창한 캘리포니아의 1월 마지막 주 목요일.
스탠포드 대학 캠퍼스에서 만난 스티븐 비건 대북 정책 특별대표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습니다. 그를 에워싸고 질문 공세를 펼치는 기자들에게 “주변을 둘러보세요. 날씨도 너무 좋지 않나요? 하하하”라며 여유 있는 농담까지 던지더군요.
하지만 쏟아지는 질문에 직답을 피했고 ‘대북 메시지를 내놓을 예정’이냐는 기본적인 물음에도 “강연을 들어보면 알 것”이란 말만 되풀이 했습니다.
‘부임 후 첫 공식석상인데, 예상대로 외교적 수사만 내놓을 건가…’
기자의 걱정은 그러나 기우였습니다.
한 시간여 이어진 강연과 질의응답에서 그는 상당한 분량의 대북 메시지를 내놨기 때문입니다. 당일 미처 다 전해드리지 못한 내용과 그 날의 후일담을 ‘우아한’과 공유합니다.
● “북미간 합의된 ‘비핵화 개념’ 아직 없다”
민감한 질문은 질의응답 시간에 쏟아졌습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질문은 ‘북미간 합의된 ’비핵화‘개념은 무엇이냐’는 것이었지요. 잠시 머뭇거리던 비건 특별대표는 “아직 세부적으로 합의된 개념과 범위가 없다”고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은 국제법상 그리고 모든 WMD와 ICBM운송 수단 등의 폐기를 비핵화로 간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진전을 이루고 있다’는 식의 외교적 수사가 아닌 북미간 비핵화 개념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공식입장은 현 상황을 냉정히 진단하는 데 큰 시사점을 던집니다.
북미간 ‘비핵화’라는 새 집을 짓는 데는 동의했지만 그 집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아직 두 건설사(북미)가 동의하지 못했다는 비유도 가능한 거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로드맵, 일종의 비핵화 설계도를 먼저 만들고 하나하나씩 진전 시켜가자는 입장인데 반해 북한은 아직도 단계별로 하나하나씩 하면서 신뢰를 쌓아가자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워싱턴의 소식통은 “이런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비건의 어깨가 상당히 무거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직업외교관이 아닌 만큼, 과정이 아닌 결과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공존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프라이빗 섹터(기업가)출신인 트럼프 대통령처럼 그 역시 포드 자동차 부사장으로 근무한 이력이 있는 만큼 둘의 케미(궁합)또한 좋은 편이라고 합니다. ● 상호 연락사무소 원칙적 합의
비건 특별대표는 이날 북미간 상호 연락사무소에 대해서도 시사했습니다. “북미간 좀더 효과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고 현재 우리(북미)가 집중하고 있는 분야중 하나”라고 말한 겁니다.
그는 이날 추가적 발언은 자제했지만 현지 소식통 등에 따르면 이미 북미간 상호연락사무소는 원칙적으로 합의된 사안이라고 합니다. 협상 상황에 밝은 한 소식통은 최근 통화에서 “김영철 부위원장이 지난 1월 방미했을 당시 이 문제를 북미간 심도 있게 논의했고 잠정 합의에 이르렀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평양과 워싱턴 상호 연락사무소는 베트남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공식화 되고 이후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북한 측 역시 그동안 뉴욕 유엔 본부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던 만큼 세계 외교의 중심지 워싱턴 진출에 내심 적극적이란 후문입니다. 어쩌면 워싱턴 외교가에서 북한 외교관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 “미국은 이미 많은 비밀 핵 시설 파악”
하지만 호의적 메시지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비건 특별대표의 연설 행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한 경고의 메시지도 함께 녹아 있습니다. 비건 특별대표는 연설에서 영변 핵 시설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습니다. 대신 “영변 외 (플로토늄과 우라늄농축) 복합단지들(complex of sites)”에 대한 폐기를 강조했습니다. 미국은 북한의 비밀 핵 시설에 대해 이미 상당부분을 자체 정보 수집을 통해 파악하고 있다는 암묵적 메시지와 함께, 포괄적 핵 신고를 거듭 압박하는 포석인 셈입니다. 외교가 실패할 경우 “비상대책(contingency plan)이 필요하며 이미 우리는 이를 마련했다”고도 말했습니다. 단 핵 목록 신고과 관련 “시점을 적시 하지 않은 만큼 신고 시점은 이전보다 유연한 입장을 보인 것”이라고 당일 뉴욕타임스는 분석한바 있습니다.
관련해 미 행정부 기류에 밝은 패트릭 크로닌 허드슨 선임연구원은 기자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냐고들 묻는다. 바로 얼마나 솔직하게 영변 외 다른 핵 시설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고하느냐에 달려 있다. 미국은 관련 시설을 80% 파악하고 있는데 북한이 우리에게 내놓은 목록은 50%미만이라고 치자. 바로 그 간극이 또 다른 북미간 갈등과 불신의 요소가 될 수 있다.”
● “리얼리티쇼 아닌 ‘진짜’가 나와야”
북한 또한 유엔 뉴욕대표부 등을 통해 이날 강연을 실시간 청취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때문에 비건 대표 측도 스탠포드 강연 후 북한이 실무접촉을 혹 취소하지 않을까 예의주시 했다는 후문입니다. 비핵화 조치를 압박한다며 강한 반발을 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북한은 반발 대신 비건 특별 대표의 북한행을 허락했습니다. 그만큼 양 측의 의지가 강하다는 의미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북미 비핵화 협상에 대한 회의론이 교차합니다. 완전한 비핵화란 관련 시설이 폐기되더라도 북한 내 핵 과학기술 인력이 존재하는 한 가능치 않다는 시니컬한 반응에서부터, 사석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신뢰할 수 없다’는 외교안보전문가들이 과반이상입니다.
하지만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27일과 28일 북미 정상은 두 번째 만남을 통해 핵 담판을 벌입니다.
척 슈머 민주당 원내대표는 최근 한 방송인터뷰에서 이런 조언을 내놨습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은 리얼리티쇼가 아니라 리얼한 ‘진짜’가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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