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노딜’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남북한에 꺼내 든 한반도 비핵화 빅딜 청구서가 선명해지고 있다. 북한엔 모든 핵시설에 생화학무기와 탄도미사일 폐기를 얹은 ‘대량살상무기(WMD) 원샷’ 타결을 제시하는 동시에, 한국을 향해선 최근 한미 연합훈련 중단이 미국의 비용 절감을 위한 것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며 향후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대폭 인상 요구를 예고한 것. 경제와 안보 이슈를 한데 섞어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트럼프식 외교 기술’을 어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북한엔 ‘핵’, 한국엔 ‘돈’ 청구한 트럼프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3일(현지 시간)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에게 하나는 한글, 하나는 영어로 된 문서 2개를 건넸다”며 “여기에 우리가 그들에게 기대하는 내용, 그 대가로 북한이 얻게 될 엄청난 경제적 미래에 관한 것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빅딜’이라고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핵무기와 생화학무기, 탄도미사일을 포기하라고 (김정은 위원장을) 아주 강하게 밀어붙였다”고 전했다.
해당 문서엔 북한에 요구하는 비핵화와 미국의 경제적 상응조치를 구체적이면서도 포괄적으로 담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제안은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에게 “통 크게(go bigger) 올인하라”고 주문했다는 협상 관계자들의 전언과도 일치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제원자력기구(IAEA) 아마노 유키야 사무총장은 4일 성명을 내고 “영변 핵시설에서 기존에 알려진 우라늄 원심분리기 농축시설이 계속 가동 중인 징후들을 포착하고 있다”고 밝혔다.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회담 결렬 후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 문제로 관심의 방향을 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오래전에 포기했다”고 하더니 이날에도 트위터에서 “한국과 군사훈련을 원치 않는 이유는 돌려받지 못하는 수억 달러를 아끼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미 국방부 장관이 전날 키리졸브 연습과 독수리훈련 폐지를 발표하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치”라고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 스스로 ‘비용 탓’이라며 속내를 밝힌 것이다. 이에 당장 한미가 상반기에 내년도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 들어가는 만큼 워싱턴의 인상 압박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12일 한미는 올해 분담금을 지난해보다 789억 원 오른 1조389억 원에 가서명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틀 뒤 각료회의에서 “더 올라가야 한다. 앞으로 몇 년간 계속 오를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내년도 협상은 1조389억 원을 기준으로 인상 폭을 조율하게 된다.
○ 북한 비핵화 시, 상응조치 비용 중 상당액 한국에 청구할 수도
사업가 출신의 트럼프 대통령은 내년 재선까지 한반도 문제에 안보와 경제 카드를 혼용해 꺼내며 남북한으로부터 최대 이익을 얻어내려 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 이어 ‘미국을 계속 위대하게(Keep America Great)’를 내년 재선 캠페인 슬로건으로 내세운 트럼프가 백인 노동자 등 주력 지지층을 공략하는 포인트가 될 수도 있다. 유현정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 표심을 끄는 것은 북핵 위협보다는 경제 성과인 만큼 트럼프 대통령도 이 관점에서 한반도 구상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한미동맹에도 경제 논리가 더욱 강조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우려도 나온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미국연구센터장은 “트럼프 행정부 이전의 미국은 한국을 ‘최혜국 대우 프레임’에서 조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포함된 한반도를 거래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어야 하는 수많은 지역 중 하나로 다루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 외교 소식통은 “트럼프 행정부는 향후 북한이 핵 포기에 나설 경우 내어줄 경제 지원 등 상응조치 비용을 한국에 대폭 전가하는 방식으로 대북 리스크를 줄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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