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후 한반도 정세가 또다시 중대한 변곡점을 맞고 있다. ‘세기의 담판’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협상이 ‘노딜’로 끝나자 한반도 안보 정세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회담이 결렬된 뒤 북한은 평북 동창리 서해 미사일발사장을 복구하고, 평양 외곽 산음동 미사일 생산단지를 활발히 가동하는 정황을 노출시켜 한미 당국을 긴장시켰다. 최근엔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미국의 ‘빅딜(일괄타결)’ 요구를 거부하고, 비핵화 협상 중단과 핵·미사일 도발 재개를 검토한다고 경고하면서 남북·북-미가 대결 국면으로 회귀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북한과 대화하되 호국영웅 헌신은 되새겨야
‘하노이 노딜’ 이후 비핵화 대화의 소강 국면에서도 북-미 당국은 협상 기조를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하지만 북한이 대미 압박과 국면 전환을 노려 또다시 ‘벼랑끝 전술’을 시도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에서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Pu) 생산을 재개하거나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시도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비핵화 협상 고비 때마다 핵·미사일 능력을 과시해 더 많은 것을 얻어내는 것은 북한의 ‘단골수법’이다. 북한은 1,2차 북핵위기 때도 협상이 막다른 곳에 몰리거나 요구가 먹혀들지 않으면 전략·전술적 도발로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 과정에서 우리 국민과 군을 겨냥한 무력도발도 끊이지 않았다. 제2연평해전(2002년 6월29일)과 천안함 폭침(2010년 3월 26일), 연평도 포격전(2010년 11월 23일) 등이 대표적이다. 북한의 ‘서해 3대 도발’로 우리 군 장병 55명과 민간인 2명이 목숨을 잃었다. 북한은 지금까지 이들 도발과 희생자에 대해 어떤 사과나 유감도 표명하지 않았다.
정부는 2016년부터 3월 넷째 주 금요일에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다. 올해 4회(22일)를 맞는 이 행사는 북한의 ‘서해 3대 도발’로 희생된 장병들을 기리고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상기하는 자리다. 군 안팎에선 이 행사가 나라를 지키다 산화한 영웅들의 헌신과 국가적 예우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여론이 많다. 군 관계자는 “남북 화해무드가 고조될수록 희생 장병들이 잊혀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북한과 대화는 하되 기념식에는 지도자와 주요 정치인 등이 많이 참석해 예우를 갖추는 것이 ‘진정한 안보’라고 본다”고 말했다.
더 강화된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북한의 진정성이 최종적으로 확인될 때까지는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군 관계자는 “9·19 남북 군사합의로 육해공 적대행위가 잠정 중단됐지만 북한은 상황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무력행동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역량과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초 국방부가 발간한 ‘2018 국방백서’에서도 그 실태가 여실히 드러난다. 백서에 따르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은 계속 증강되고 있다. 백서는 북한이 무기급 플루토늄 50여 kg 외에 고농축우라늄(HEU)도 상당량 보유한 것으로 추정했다. 2016 국방백서의 핵물질 관련 기술(PU는 50여 kg, HEU 프로그램은 상당 수준 진전)과 비교해 HEU의 양산 및 다량 보유를 군 차원에서 공식화한 것이다. 군 당국은 HEU 생산은 은밀하게 진행돼 구체적인 보유량은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북한이 영변·강선 핵시설에 구축한 우라늄농축시설에서 매년 최소 핵무기 2, 3개 분량의 HEU를 생산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북한은 2010년 미국 핵물리학자인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를 초청해 영변의 우라늄농축시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당시 헤커 박사는 “영변에 설치된 2000개의 원심분리기에서 연간 40kg 정도의 HEU 생산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에 이 시설의 규모를 두 배가량 확장하는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 지금은 4000개 이상의 원심분리기를 가동하면 연간 60∼80여 kg의 HEU를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선 핵시설의 우라늄농축설비도 영변과 맞먹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노이 핵담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영변 핵시설 외에 ‘플러스알파’로 강선 핵시설의 폐기를 끝까지 요구한 것도 이 시설의 핵물질 생산능력이 상당한 수준임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이를 종합해 볼 때 북한이 이미 보유한 HEU만 수백 kg에 이르고, 비핵화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생산을 멈추지 않아 2020년경에는 핵탄두 100여기 분량의 핵물질을 보유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미사일 능력도 한층 강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은 단거리·준중거리·중거리미사일은 물론이고 미 본토 타격이 가능한 ICBM 등 14종류의 미사일을 개발했거나 보유한 것으로 백서는 적시했다. 북한은 2017년 11월 말 화성-15형 ICBM 발사 이후 미사일 도발을 중단한 상태다.
일각에선 북-미 긴장이 고조될 경우 북한이 신형 ICBM인 화성-13형을 시험 발사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액체연료와 산화제 주입에 최소 30분 이상이 걸리는 화성-14,15형과 달리 화성-13형은 연료와 산화제를 미리 주입해둔 고체엔진을 장착해 언제든지 쏴 올릴 수 있다. 도발을 실행에 옮길 경우 기습·충격효과도 배가될 수 있다는 얘기다. 미 정보당국은 북한이 2020년경이면 핵을 탑재할 수 있는 최신형 이동식 ICBM을 최대 30여기 이상 보유하는 한편 성능이 개량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도 실전배치할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의 재래식 위협도 여전한 것으로 평가됐다. 120mm·200mm 견인방사포를 전방 및 해안지역에 집중 배치하는 한편 사거리연장탄과 화염탄 등 특수탄을 개발하는 등 재래식 전력 증강도 계속 진행 중이라고 백서는 지적했다. ‘선군호’(신형 전차) ‘준마호’(신형 장갑차) 등 신형 장비의 추가 생산 및 성능 개량과 함께 우리의 특전사령부에 해당하는 ‘특수작전군’을 신설하는 등 북한의 특수전력이 강화된 내용도 기술됐다.
방위산업과 국가안보 불가분의 관계
북한의 비핵화를 둘러싼 한반도 정세가 요동칠수록 국가안보의 중요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어떤 위기 상황이 닥쳐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스스로 지켜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안보와 방위산업은 ‘바늘과 실’의 관계로 볼 수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한 핵심전력 가운데 국내 방산업체가 제작한 무기가 적지 않다는 게 그 방증이다.
실제로 국내 방위산업의 역사는 안보위기를 극복하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에 비견된다. 1970년대 초 북한의 도발 위협과 주한미군 철수 등 안보 상황이 악화되자 당시 정부는 무기 국산화를 내걸고 자주국방을 본격 추진했다. 민관군은 물론이고 학계 등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미제 소총과 박격포를 모방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대대적인 전력 증강사업을 단계별로 진행시켰다. 그 결과 지금은 전차와 함정, 자주포를 비롯해 잠수함까지 독자적으로 제작할 정도로 방산 역량이 발전했다. 1990년대부터는 함대함 유도미사일을 비롯한 각종 정밀유도무기와 초음속 고등훈련기, 경공격기, 헬기까지 설계 제작한데 이어 한국형전투기(KFP) 개발도 착착 진행하고 있다.
‘메이드 인 코리아’ 무기의 해외 수출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975년 미국과 필리핀, 인도네시아에 소총 탄약을 판매하던 시절에서 지금은 전차와 경공격기, 잠수함 등 육해공 주력 무기들을 8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K-9 자주포와 같은 명품무기가 북유럽 국가에 판매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올 2월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에서 열린 국제방산전시회(IDEX)에도 한화와 한국항공우주산업(KAI), LIG넥스원 등 30여개 방산업체들이 참가해 국산무기 판매를 위한 마케팅을 적극 펼쳤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2014∼2018년 한국의 무기 수출이 그 직전 5개년보다 94% 늘어난 것으로 분석했다.
하지만 양적 질적 성장을 거듭해온 국내 방산업계가 최근에 ‘한계 상황’에 봉착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국책연구기관인 산업연구원(KIET)은 지난달 발간한 ‘2020년대를 향한 방위산업 핵심이슈’ 보고서에서 그 징후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부터 국내 방산기업의 경영 실적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주요 방산기업의 매출과 수출, 영업이익이 모두 줄어드는 ‘삼중고’가 깊어지면서 산업 전반에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현 정부의 국방예산에서 방위력 개선비가 크게 증가했음에도 매출의 85% 이상을 내수에 의존하는 방산업계의 경영 사정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는 점이다. 방위산업이 튼튼한 국방을 뒷받침하면서 성장을 이어가려면 무기 조달 등 사업관리 중심의 현 체제가 범국가적 산업정책으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보고서는 진단했다. 인공지능(AI)이나 드론, 로봇, 3D프린팅 등 4차 산업혁명의 첨단기술을 적극 활용해 방위산업이 일대 도약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방산 발전을 위한 법적·제도적 지원도 절실하다는 지적이 많다. 방위산업 육성을 가로막는 규제와 ‘칸막이’를 걷어내고 업계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방위산업발전법 제정 등이 최우선 과제로 거론된다.
방산업계의 경영압박 요인으로 지목된 지체상금 제도의 개선도 시급하다는 주장이 적지 않다. 지체상금은 계약 물품을 늦게 납품한 업체에 지연된 일수만큼 부과되는 일종의 ‘벌금’이다. 국내 업체의 무기 양산사업에 부과되는 지체상금이 너무 높아 계약금액보다 지체상금을 더 물어야 하는 사례가 왕왕 있었다. 방위사업청이 최근 민간전문가(옴부즈맨)로 구성된 지체상금 심의위원회를 운영하기로 한 것도 지체상금에 대한 업계의 애로를 고려한 것이다. 법률전문가와 회계사, 손해사정사 등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심의위는 업체가 지체상금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면 이를 검토해 감면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아울러 사정·감사당국의 과도한 방산비리 의혹 수사 및 감사가 방산업계의 사기를 꺾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방산 수출 확대를 위한 정책적 지원도 필요하다. 정부와 업계가 ‘전략적 동반자’로서 방산 수출 촉진을 위한 연구개발(R&D) 확대와 수출 지원 해외인력 확충, 시장개척과 마케팅에 적극 협력하고, 관련 정보를 상시 주고받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는 것이다. 청와대에 방산정책을 총괄 조율하는 ‘컨트롤타워(방산비서관)’를 신설하고, 대통령이 주재하는 ‘방위산업점검회의’를 통해 우리 방위산업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비전·전략을 체계적으로 수립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방산업계의 한 관계자는 “방위산업은 국가안보와 일자리 창출, 해외 수출을 통한 국부 증대, 신기술 개발 등 국익 전반에 기여할 잠재력이 큰 분야”라며 “국내 방산업계가 경쟁력을 갖춰 세계 시장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범정부 차원의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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