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안보리 제재에도 北 ‘에너지난’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청년이 묻고 우아한이 답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13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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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2017년 12월 22일 채택한 제10차 대북제재 결의안 2397호는 북한에 대한 연간 정유제품 공급 상한선을 기존의 200만 배럴에서 50만 배럴로 75% 삭감했습니다. 원유 공급도 현 수준(400만 배럴 추정)에서 동결됐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아직 에너지난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요? 아울러 북한의 원유 수입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고, 수입한 원유는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남성현 한국해양대 해양플랜트운영학과 14학번(아산서원 14기)

A. 현재 북한은 전통적 우방국인 중국으로부터 원유를 공급받고, 중동지역과 러시아에서 원유 및 석유제품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유엔의 대북 제재로 중국에서 유입되는 원유와 석유제품의 총량은 대폭 감소했지만 러시아로부터의 공급량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를 들어 올해 1, 2월 기준으로 러시아는 북한에 석유제품 1만 358톤을 공급했는데, 이 물량은 중국이 북한에 공급한 1170톤과 비교하면 8.8배에 달합니다. 미국과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이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이행에 비교적 협조적인 것에 비해 러시아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러시아의 지원에 따른 재고 증가에 국제유가 하락이 겹치면서 최근 북한의 석유제품 가격은 예년에 비해 오히려 떨어진 상태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북-중 관계가 소원해진 2014년 이후부터 합법적인 방식과 밀거래 방식 등 두 가지 루트로 북한에 대한 석유제품 공급을 꾸준히 늘려왔습니다. 공식적인 통계에 잡히지 않는 비공식적 매매나 블랙마켓(암시장) 루트를 통한 거래 물량은 훨씬 큰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제3국 선박을 통하거나 일반 어선 또는 화물선을 이용하기도 하고, 국경지역에서 밀반입하는 등 여러 유형의 비공식적 매매가 나타났고 이것은 유엔 제재 하의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해 6월 7일 포착된 파나마 선적 뉴리젠트호와 북한 유조선 금운산3호의 불법 환적 모습. 두 선박은 최소 5개의 호스를 연결해 80분간 석유 제품을 환적했다고 미국 국무부가 밝혔다.
지난해 6월 7일 포착된 파나마 선적 뉴리젠트호와 북한 유조선 금운산3호의 불법 환적 모습. 두 선박은 최소 5개의 호스를 연결해 80분간 석유 제품을 환적했다고 미국 국무부가 밝혔다.
특히 러시아로부터 수입되는 석유 제품의 일부는 현지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의 임금 대신 받는 형식으로 거래되고 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도시 재생 사업에 북한 노동자 3만 명이 투입됐고, 앞으로도 100만 명 이상의 북한 노동력이 지속적으로 러시아 전역에 투입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유엔 안보리가 결의안을 통해 각국이 채용하고 있는 북한 노동자들을 올해 말까지 모두 돌려보내도록 했지만 북한은 갖은 편법을 동원해 노동자를 잔류시키거나 추가 파견하려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대북 에너지 지원은 남·북·러 가스관 건설이나 야말 액화천연가스 수출 등 다양한 에너지 카드를 제시하면서 한반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계산에 따라 실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대북 에너지 지원은 북한 정권의 생존에 큰 영향을 줄뿐만 아니라 자국에 대한 경제 제재에 나서고 있는 미국에 불만을 표출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러시아의 대북 에너지 지원이 계속되는 한 미국과 유엔의 대북제재는 큰 효과를 거두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유엔 제재의 영향으로 최근 북-중, 북-러 간 무역규모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블랙마켓이나 밀무역을 통한 거래를 감안하면 총 무역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실정입니다.

현재 러시아에서 북한으로 유입되고 있는 원유와 석유제품은 시베리아 송유관 원유로, 우랄산 및 러시아의 타 지역 원유에 비해 양질이고, 중국의 다칭 정유소에서 정제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북한으로 들어온 원유와 석유제품은 냉전시절 북한이 중국, 러시아와 등거리 외교를 효과적으로 구사하면서 양국으로부터 재정과 기술 지원을 받아 보유한 2개의 정유시설에서 처리되게 됩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는 북한 남포항 주변에 몰려있는 불법 환적 선박들의 위성 사진을 3월 공개했다. 이들 선박의 
측면에는 수중 송유관 연결장치가 설치된 것이 포착됐다. 위원회는 “북한의 선박 간 불법 환적 범위나 규모, 정교함이 확대됐다”고 
밝혔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 제공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는 북한 남포항 주변에 몰려있는 불법 환적 선박들의 위성 사진을 3월 공개했다. 이들 선박의 측면에는 수중 송유관 연결장치가 설치된 것이 포착됐다. 위원회는 “북한의 선박 간 불법 환적 범위나 규모, 정교함이 확대됐다”고 밝혔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 제공

함경북도 나진시에 위치한 승리화학연합기업소는 러시아가 지원한 정유시설인데, 구소련 붕괴이후 한때 가동이 중단되었다가 최근 재가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78년 중국의 지원으로 평안북도 피현군에 건설된 봉화화학공장은 최근까지 북한 내에서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원유를 정제하고 처리하는 정유시설로서 현재 유엔안보리 제재를 위한 집중 관찰대상이기도 합니다. 봉화화학공장은 건설 당시 처리 능력이 100만 톤이었는데, 1980년 추가 공사를 거쳐 연간 250만 톤의 원유처리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공장은 중국 단둥 시로부터 29.4km의 지하 송유관을 통해 원유를 공급받고 있습니다.

냉전시절 소련은 국제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소위 ‘형제국 디스카운트 가격(Brotherhood price)’로 북한에 에너지를 제공했습니다. 북한은 이 가격으로 오랜 기간 엄청난 에너지 원조 수혜를 받았고, 심지어 1980년대 초까지는 남한보다 전력사정이 훨씬 좋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1990년대 초 구소련 붕괴이후 대북 에너지 원조가 사실상 중단되면서 북한의 에너지 상황은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이후 에너지 상황이 나아진 것은 러시아산 원유나 석유제품이 선박, 열차, 트롤레이(트럭)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대량으로 북한에 유입되었기 때문입니다. 평양에서는 택시 등 석유제품을 사용하는 교통수단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또 평양 이외 지역의 유가가 평양보다 낮아지는 경향도 나타났습니다.

안세현 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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