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깨진 3당…협상 재개 시점 예측 어려워
흔들리는 나경원 리더십…협상 모멘텀 실종 우려
기형적 6월 임시국회 불가피…추경도 장기 표류
민주, 각종 상임위 가동 전략으로 한국당 압박
한국, '인사청문회·국정조사' 추진으로 맞대응
여야 교섭단체 3당이 24일 우여곡절 끝에 국회 정상화에 대한 합의를 도출했지만 자유한국당이 곧바로 이를 뒤집으면서 정국은 완전한 ‘블랙아웃(대정전)’으로 빠져들 전망이다.
마지막 본회의가 열렸던 지난 4월5일 이후 80일 만에 가까스로 국회 파행 사태가 해소된 지 두 시간여 만에 정상화 합의문이 휴지통에 들어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한국당은 이날 오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여야 3당 교섭단체 원내대표 간 협상에서 도출된 국회 정상화 합의안을 추인하지 않고 거부키로 결정했다.
이보다 불과 두 시간 앞서 여야 3당 원내대표는 선거제·검찰개혁법 등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법안의 ‘합의정신에 따른 처리’ 약속과 경제원탁회의 개최, 6월 임시국회 내 추가경정예산(추경)안 처리 등을 골자로 하는 국회 정상화 합의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당 의총에서 의원들이 패스트트랙 법안의 ‘합의 처리’ 약속이 미진하다고 반발하면서 합의 약속은 결국 뒤집히게 됐다. 합의에 앞서 의총 추인이 먼저 있었어야 한다는 의원들의 지적도 추인 거부의 주요 이유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입장문을 통해 “당 소속 국회의원 일동은 헌법 질서를 파괴하고 의회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선거법, 공수처법 패스트트랙 법안을 원천무효화 시키라는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80일 만에 정상궤도에 오르는 듯했던 국회는 정상화를 기약할 수 없는 시계제로 상태에 빠져들게 됐다.
당장 한국당이 3당 원내대표 간 합의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이를 뒤집어 버린 상황에서 언제쯤 국회 정상화 협상이 재개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시정연설 청취를 위한 본회의가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나 원내대표가 최선을 다했는데 한국당 안에서 합의를 부정하는 행위는 민심을 거스르는 것이자 국회 정상화를 바란 국민의 여망을 전면 배반한 행위”라며 강한 유감을 표했다.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도 “나 원내대표가 당내 추인을 전제로 얘기를 했다”며 “우리로서는 추인은 당연히 될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상당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렵사리 협상이 재개된다 해도 한국당 의원들이 요구한 패스트트랙 법안의 ‘합의 처리’ 약속은 민주당 입장에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어서 난항이 예상된다.
나 원내대표의 당내 리더십에도 상처가 불가피하다. 이날 한국당 의총에서 일부 의원들은 나 원내대표를 비롯한 원내지도부의 재신임 문제까지 거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과적으로 재신임까지는 가지 않는 것으로 정리됐지만 나 원내대표의 리더십이 흔들리게 된 상태에서 협상을 힘 있게 끌고가기는 어렵지 않냐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합의안 부결로 나 원내대표가 보다 공세적으로 협상에 임할 발판이 마련된 것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된다. 나 원내대표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결국 의총에서 부결시킨 것은 더 큰 힘을 갖고 합의할 수 있도록 의원들이 제게 더 큰 권한을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정상화 합의안 무효라는 초유의 사태로 3당 원내대표 간 신뢰가 깨진 상황이어서 향후 협상 재개를 점치기 어렵다는 전망에 보다 힘이 실린다. 합의안 무효를 놓고 향후 예상되는 ‘네 탓’ 공방 과정에서 여야 간 감정의 골만 더 깊어져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비관론도 나온다.
이번 사태로 6월 임시국회도 상임위원회 전면 가동을 벼르는 민주당과 선별적 등원을 선언한 한국당 사이에서 당분간 기형적 운영이 불가피해졌다.
민주당은 각 상임위원회 간사 및 위원들로 구성된 ‘민생입법처리단’을 가동시키고 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 간에 각종 상임위를 개최하는 등 ‘일하는 국회’로 한국당을 압박하고 있다.
이 원내대표도 협상 재개의 모멘텀이 마련되기까지 당분간은 국회 정상화 협상에 매달리기보다 정책 경쟁으로 한국당을 자극해 국회 등원을 이끌어내는 데 주력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는 “우리는 기존에 말한대로 법적 국회 정상화의 길이 이미 시작된 만큼 모든 상임위와 소위에 정상적으로 임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국당도 나름의 ‘할 일은 하는 국회’를 표방하며 국회 정상화 없이도 인사청문회와 국정조사 등에 선별적으로 등원한다는 기존 방침을 이어가기로 해 여야 간 대치는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나 원내대표는 입장문에서 “시급한 국가 안보 위기 및 국민의 안전과 관련한 현안에 대해서는 관련 상임위에서 철저하게 챙겨나가겠다”며 검찰총장·국세청장 후보자 청문회와 북한 어선 삼척항 정박 사건 및 붉은 수돗물 사태애 대한 국정조사 추진을 예고했다.
국회 정상화 약속이 뒤집히면서 정부가 제출한 6조7000억원 규모 추경안의 운명도 불투명해졌다. 정부가 지난 4월25일 국회에 제출한 이번 추경은 이날까지 60일을 표류 중이다.
이에 따라 국회 문턱을 넘기까지 모두 45일이 걸린 지난 2017년과 2018년 추경안을 넘어서 문재인 정부 들어 가장 오랜 기간 표류한 추경으로 기록된 상태다.
이날 한국당의 불참 속에 진행된 본회의에서 이낙연 국무총리가 추경 심사의 첫 절차인 시정연설을 진행했지만 국회 정상화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정상적 심의는 불가능해졌다.
추경안은 총리의 시정연설을 시작으로 각 소관 상임위원회별 예비심사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심사, 본회의 심의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상임위 개최 권한이 상임위원장에게 있는 만큼 한국당이 위원장인 상임위는 예비심사를 위한 회의 개최가 자체가 어렵다. 한국당을 뺀 여야 4당이 위원장인 상임위의 경우도 회의 개최를 놓고 한국당의 격렬한 반발이 예상된다.
특히 추경 본심사를 진행할 예결위 위원들의 임기는 이미 지난달 29일에 끝났다. 이에 따라 각 당이 예결위원들을 새로 구성해야 하는 데다 한국당 몫인 예결위원장 선임 건은 본회의 의결도 필요한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여야 3당 원내대표는 당초 오는 28일 예결위원장 선출을 위한 본회의를 열고 예결위 추경 심사도 같은 날 부터 시작하기로 합의했지만 결국 무효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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