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가 의심하는 文대통령의 대북 영향력[하태원 기자의 우아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6일 14시 00분


‘역사는 반복 된다’는 금언(金言)이 불현듯 생각났습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3일 TV뉴스에 출연해 했다는 말 때문입니다. 뭐라고 했냐고요?

“지금 북한에 대해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아베 총리)

맥락은 이렇습니다. 토론 진행자가 ‘문재인 대통령과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만났으면 북-일 관계의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지 않았을까’라고 질문하자 내놓은 대답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문 대통령과 한국 정부의 대북 영향력이 별거 아니라고 평가 절하한 것입니다.

시간은 7년 전으로 훌쩍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명박(MB) 당시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사상 최초로 독도를 전격 방문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 2012년 8월 10일입니다. 73분간의 방문에 대해 MB는 “3년 전부터 준비한 것이다. 내 입장에서 독도 방문은 일종의 지방 순시”라고 말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12년 8월 10일 독도를 전격 방문해 ‘한국령’이라고 새겨진 암반비석을 어루만지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경비대원을 격려한 뒤 대형 태극기가 새겨진 조형물을 살펴보는 모습. 동아일보 DB
이명박 대통령이 2012년 8월 10일 독도를 전격 방문해 ‘한국령’이라고 새겨진 암반비석을 어루만지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경비대원을 격려한 뒤 대형 태극기가 새겨진 조형물을 살펴보는 모습. 동아일보 DB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음에 벌어졌습니다.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두 차례의 발언이 독도방문 자체보다 한일관계 악화에 결정타를 날린 겁니다.

방문 나흘 뒤 MB는 충북 청원 한국교원대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아키히토) 일왕도 한국 방문하고 싶으면 독립운동 하다가 돌아가신 분들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과하면 좋겠다”며 “한 몇 달 고민하다 통석의 염, 뭐 이런 단어 하나 찾아올 거면 올 필요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천왕’의 존재를 신성시 하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한일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충격을 받았다고 평가했습니다.

또 한 가지 발언은 이 전 대통령이 13일 국회의장단과의 청와대 오찬 중에 나왔습니다. “(반발하고 있는) 일본 측 반응은 예상했던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영향력도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통상무역전쟁으로 치닫는 현 상황에서 우리정부의 대북(對北) 영향력이 별거 아니라고 폄훼한 아베 총리의 발언의 ‘데자뷔’ 처럼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물론 이 발언이 대한민국 국민 전체를 흥분시킬 정도의 망언(妄言)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북-미 대화를 견인해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만들어 보려고 하는 문재인 정부를 제대로 ‘디스’한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문 대통령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2002년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오른쪽)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일본 총리의 방북은 이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동아일보 DB
2002년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오른쪽)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일본 총리의 방북은 이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동아일보 DB

국가 간의 관계는 사인(私人) 간의 관계와는 분명 다르고 분명 더 냉철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금의 한일관계는 서로를 감정적으로 자극하는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누가 봐도 우리정부가 최우선 순위를 두고 추진하고 있는 북핵 협상 외교의 능력을 깎아 내리려는 것이 아베 총리의 혼네(本音·본심)가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북한은 아베 총리의 ‘러브콜’에 응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태원 채널A 보도제작부(부장급·정치학 박사수료)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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