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일본의 경제보복조치를 기점으로 연일 SNS를 통해 극일(克日) 여론전을 주도하는 것과 관련해 일제강점기 시절 지역 독립운동에 앞장서 온 그의 가족사가 관심을 받고 있다.
조 전 수석의 ‘폭풍 SNS’를 두고 정치권 해석이 엇갈리는 가운데 지역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가족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 배경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조 전 수석은 2017년 5월11일 문재인 정부 초대 민정수석에 임명된 후 그의 모친이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웅동학원이 고액상습체납자 명단에 올라 있다는 보도로 화제가 됐다.
그러나 이후 열악한 재정사정이 알려지면서 ‘민족사학 웅동학원을 살려야 한다’는 후원 여론이 확산되기도 했다. 조 전 수석 모친인 박정숙 웅동학원 이사장은 당시 “후원 요청을 정중히 사양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경남 창원 진해 웅동중학교의 전신인 계광학교는 1914년 호주 선교사에 의해 인가를 받았다. 계광학교의 전신은 지역 유지들이 서당을 신식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로 바꾼 1912년 창동학숙이다.
당시 경남 웅동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계광학교 교사인 주기용, 배재황, 허전 등이 중심이 됐고 1919년 4월3일 교사들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웅동주민 3000명과 시위대가 대한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다.
계광학교 교사들은 3·1운동에 가담해 다수가 체포됐는데, 1930년 9월28일자 중외일보 기사에는 교사 ‘조맹규·조원갑·조정호·조명진’ 등이 체포돼 “가르칠 선생이 전부 없어 부득이 임시휴교를 하게 됐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웅동은 ‘창녕 조씨’ 집성촌으로, 조맹규씨는 조 전 수석의 종조부(조부의 형제)다.
또한 조 전 수석의 고모할머니인 조맹임씨는 1928년 ‘웅동여자청년회’를 조직하고 문맹퇴치운동을 벌인 민족운동가다. 조맹임씨는 투옥 후 고문으로 허리뼈가 부러져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고 한다.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해 한때 폐교되기도 했던 웅동학교는 이후 복교돼 경남 창원 진해에서 민족자강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1952년 웅동중학교로 전환되면서 정윤호 초대 교장이 부임했는데, 그는 정의화 전 국회의장의 부친이다. 조 전 수석은 지난 4일 부산에 내려가 정 전 의장을 만나기도 했다.
이후 조 전 수석의 선친이 1985년 사재를 출연해 학교를 인수했다. 조변현 전 이사장은 2013년 지병으로 별세했는데, 조 전 수석 부임 당시 논란이 된 지방세 체납도 이때 발생했다.
당시 조 전 수석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웅동은 선산이 있는 고향으로 종조부께서 웅동학교 교사이기도 했고, 집안 어르신들이 힘을 보태 만든 민족사학이 폐교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요청에 따라 재단을 인수한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조 전 수석은 청와대 재임 기간이었던 지난달 12일을 기점으로 연일 SNS로 항일 여론전에 앞장서고 있다. “지레 겁먹고 쫄지 말자”는 극일 메시지나 일본어로 “한국인의 DNA 속에 이순신 정신과 의병·독립군 경험이 녹아 있다”며 “일본이 우리나라를 정치·경제적으로 능멸한다면 우린 정당 방위를 할 수밖에 없다”는 글로 경고하기도 했다. ‘죽창가’ ‘매국’ ‘친일파’ 등 민감하고 강경한 단어나 표현을 앞세운 글도 남겼다.
조 수석의 항일 여론전에 공직자로서 ‘도를 넘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다만 조 전수석의 ‘항일 여론전’ SNS는 문 대통령의 참모로 시작했지만 여기에는 공직자이기 이전에 항일운동을 이어온 가풍을 이어받은 후손으로 일본의 부당한 경제보복과 관련해 극일 의지를 북돋우는 한편 일각의 터무니없는 주장에 참지 않겠다는 의지도 담긴 풀이된다.
조 전 수석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생을 기린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 일본 우익 세력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주전장’,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를 다룬 영화 ‘봉오동 전투’ 등 항일 영화를 보고 글을 올리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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