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조국 지명 철회, 이낙연 총리가 건의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25일 14시 03분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를 결정한 22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문재인 대통령의 오른편에 이낙연 국무총리가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사진이 동아일보에 실렸다. 그것도 그냥 다문 게 아니라 아래턱에 표시가 날 만큼 어금니에 힘을 준 모습이었다.

동아일보 23일자 3면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동아일보 23일자 3면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을 지낸 지일파(知日派) 총리 이낙연은 알 것이다. 지소미아 파기가 어떤 의미와 무게를 지니는지를.

안보 걱정하면 新친일파라고?

그는 작년 10월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판결 이후 정부 대응 총괄을 맡고 있다. 한 달 전 카타르 등 순방 중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도쿄의 ‘상황을 볼 줄 아는 분’과 연락하고 있다”고 했다. 그 때만 해도 이낙연은 낙관적이었다. “한일양국은 세계경제 성장과 동북아 안보에 협력하며 기여해왔는데 이것을 흔들거나 손상을 줘선 안 된다”고 했다.

지금 일본에선, 문재인 정부가 존재하는 동안은 양국 신뢰에 한계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지소미아는 단순한 정보교환협정이 아니다. 국가 간 신뢰가 파기되면서 한미일 안보협력은 물론 한미동맹의 틀도 흔들리게 된 것이다.

그 지소미아 파기가 불러올 안보 불안을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단칼에 ‘신(新)친일파’로 매도했다. 그런 집권세력 내에서 “파기는 안 된다”고 말하기 쉬울 리 없다. 그래서 더욱 이 총리의 목소리가 절실했던 것이다. 이낙연은 왜 직(職)을 걸고, 대통령에게 독대를 청해서라도, 그래선 안 된다고 진작 말하지 못했을까.

대선주자 1등이라고 몸조심하나

지난해 미국의 한 고위 관료가 “나는 트럼프 정부 내 레지스탕스”라고 알린 적이 있다. 미국 행정부 안에 트럼프 대통령을 제어하는(심지어 무시하는) ‘어른’이 존재하고, 그래서 미국이 지켜지고 있다는 거다. 청와대는 반미 대신 반일 운동권으로, 민주당은 ‘반일이 총선에 좋다파’로, 내각은 말 잘 듣는 손발로 채워진 문재인 정부다. 그 안에서 아무도 “안 된다” 말을 못할 때, 그래도 어른답게 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낙연 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무리한 주문(또는 기대)라는 것, 안다. 가만있어도 이낙연은 대선주자 선호도 1등인데 왜 평지풍파를 왜 일으키겠나. 그러나 가만있으면 ‘친문 직계’가 아닌 그는 민주당 대선 경선을 통과하기 어렵다. 운동권 시절부터 패권주의로 죽고 살아온 친문세력이다. 그들이 노무현 시절 고건 총리를 연상케 하는 이낙연에게 곱게 꽃가마 태워줄 것 같은가.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 사표 던져


김영삼 정부 때 이회창은 청와대비서실장 박관용한테 “내각에 지시하지 말라”고 요구했던 대쪽총리였다(하긴 이낙연도 전임 임종석 비서실장의 DMZ 시찰에 격노한 적은 있다). 헌법에 명시된 총리 권한을 행사하겠다고 사사건건 대통령과 충돌하던 그는 해임당하기 직전, 사표를 던져버렸다. “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

1994년 4월 22일 사표를 던지고 정부종합청사를 떠나는 이회창 당시 총리. 동아일보DB
1994년 4월 22일 사표를 던지고 정부종합청사를 떠나는 이회창 당시 총리. 동아일보DB


1994년 4월 변호사 문재인이 “김 대통령의 인사 가운데 가장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이 총리가 물러난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라고 말했다는 기사가 한겨레신문에 나온다. “그동안 이 총리가 법치주의에 근거한 합리적 행정 구현에 노력해왔음에 비추어 볼 때 총리로서 자신의 직무상 권한을 충분히 행사하려는 것이 사임의 배경이 된 데 대해 현 정부를 강력히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런 국민의 성원으로 이회창은 단박에 대선주자급으로 벌떡 일어섰다.

예나 지금이나 정파적 이익에 혈안

오해하지 마시라. 이 총리의 대권을 위해 “아니오” 하라는 게 아니다. 나라를 위해 할 말을 해달라는 것이다. 왜 이 나라 위정자들은 임진왜란 때나 병자호란 때나 지금이나, 제 나라 제 국민은 생각 않고 자기네 당파와 권력 지키기에만 혈안인지, 분하고 한심하다.

한창 ‘이낙연 특사’ 기대가 뜨던 지난달, 그가 일본의 협상 파트너로 나섰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친문세력은 2+1(한일기업+한국정부) 해법 등으로 이 총리가 덜컥 한일갈등을 해결하고 나폴레옹처럼 개선할까 봐 불안해 못 보냈는지도 모른다. 내년 총선 전에 해결이 돼도 걱정이고, 경제는 악화일로인데 핑계거리가 없어져도 문제다. 이러다 정말 이낙연이 되면 더 큰일이다, 라는 소리도 친문세력 안에선 나오고 있다.

병자호란 때도 그랬다. 인조반정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이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망각하고 후금과 결탁해 예의 나라 조선을 오랑캐와 금수의 나라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갇힌 반정세력에는, 화친을 주장하면 패주 광해군을 옹호하는 세력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일본과 적극적 외교적 해법을 주장하면 친일파로, 지소미아를 강조하면 신친일파로 몰리는 것처럼.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영화 ‘남한산성’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영화 ‘남한산성’


민주당 “지소미아는 매국협상”

2016년 말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였던 문 대통령은 “일본이 군사대국화의 길을 걷고 있고 특히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등 한일간 영토분쟁이 있는 마당에 지소미아를 체결하는 게 적절한지 의문”이라고 반대의사를 명백히 했다. 민주당은 ‘굴욕적 매국협상’이라고 펄펄 뛰었다.

설령 대법원 징용 판결이나 화이트리스트 배제 같은 갈등이 없었더라도, 일본과 북한의 군사정보를 교환한다는 것이 현 정부는 친일행위처럼 싫었던 거다. 남북의 평화경제를 위해선 주한미군도 부담스러운 판에 일본까지 군사대국으로 만들어줄 순 없다. 집권세력이 이런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으면 10월 22일 일본왕의 공식 취임식 때 이 총리가 대통령 대신 특사로 참석한들, 경제문제(수출규제)부터 안보문제(지소미아)까지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본을 잘 알고 일본과 손잡았던 고 김대중 대통령의 수제자답게, 과연 이낙연은 한일갈등을 풀어내고 국민 앞에 리더십을 입증할 수 있을까.

조국의 장관후보자 지명 철회 건의하라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지금 이낙연이 과거 문재인 말씀대로 총리의 직무상 권한을 행사하면서, 가장 어른답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지명 철회를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것이다.

25일 조국은 ‘불철저하고 안이한 아버지였음을 겸허하게 고백’한다고 사과 같지 않은 사과를 했다. “기존의 법과 제도에 따르는 것이 기득권 유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고 말함으로써, 자신과 가족 특히 딸이 법과 제도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고(따라서 잘못은 없고), 자신들은 기득권 영구화에 성공했으나 앞으로 386카르텔 아닌 국민과 그 자녀세대가 기득권에 달려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으므로, 국민청문회든 뭐든 간단하게 끝내고 반드시 법무장관이 돼서 기존의 법과 제도를 완전 개비하고 말겠다고 선언했다.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가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인사청문회 준비단 사무실로 출근하면서 기자들에게 견해를 밝히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가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인사청문회 준비단 사무실로 출근하면서 기자들에게 견해를 밝히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조국은 아직도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국민이 분노하는지, 심지어 왜 촛불을 들었는지도 모르고 있다. 지난주엔 돈으로 장관자리를 사려하더니, 이 정도면 국민의 마음도 살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이 총리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아니면 꽃가마 가마꾼이나 하든지

우리 헌법은 총리가 국무위원(장관)의 임명을 대통령에게 제청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총신(寵臣) 조국을 이 총리가 제청하지 않았다는 건 세상이 다 안다(총리로서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다). 한 달 전 카타르에서 기자들이 “조국 수석의 죽창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이낙연은 “내가 아직 못 봐서 뭐라고 할 수 없네”하며 넘어갔다고 한다(못 봤을 리 없다). 부자 몸조심도 좋지만 너무 몸을 사리다간, 몸만 남을 수 있다.

조국에게 쏟아지는 의혹들도 이 총리가 아직 못 봐서 모른다고는 못할 것이다. 이 정도 의혹과 그 정도 건방이면 조국이 설령 장관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총리로서 대통령에게 장관 해임을 건의해야 마땅하다. 이낙연의 진정한 리더십을 국민이 다시 볼 것이다.

그것도 못한다면…이낙연은 조국 장관 아래 국민과 함께 눈치 보는 총리로 연명하다 꽃가마 떠메고 떡고물이나 고대하는 가마꾼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 전에 미-일과 멀어져 북-중-러에 끌려가는 경제 불안, 안보 불안으로 나라와 함께 위기에 빠지든지.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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