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너절한 남측 시설들을 싹 들어내라”며 금강산관광지구 내 남측 시설의 철거를 일방적으로 발표하면서 남북 관계가 한층 경색된 국면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특히 5일 스톡홀름 북-미 실무협상 결렬 후 북한이 이번엔 금강산 시설 철거라는 구체적인 대남 압박 카드를 꺼내들면서 문재인 정부를 볼모로 미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 나섰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 김정은 “금강산, 남북 관계 상징물 아냐”
김 위원장은 금강산지구를 둘러본 뒤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 시설들을 남측의 관계 부문과 합의하여 싹 들어내도록 하고 새로 건설하여야 한다”고 지시했다고 노동신문이 23일 전했다. 그는 “금강산이 마치 북과 남의 공유물처럼, 북남 관계의 상징, 축도처럼 되어 있고 북남 관계가 발전하지 않으면 금강산 관광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분명히 잘못된 일이고 잘못된 인식”이라고도 했다.
지난해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남북 정상이 조건이 마련되는 대로 각각 2008년, 2016년부터 중단돼온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에 합의했지만 1년 1개월 만에 일방적으로 남한 시설 철거 및 독자 개발을 선언한 것.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평양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금강산의 남측 자산에 대한 몰수 조치를 해제하는 데 동의했다고 밝힌 점을 감안하면 김 위원장은 이런 정상 간 약속도 걷어찬 셈이다.
김 위원장은 대단히 이례적으로 부친인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절의 금강산 구상을 맹비난했다. “손쉽게 관광지나 내어주고 앉아서 득을 보려고 했던 선임자들의 잘못된 정책” “국력이 여릴 적에 남에게 의존하려 했던 선임자들의 의존 정책이 매우 잘못됐다”는 것. 김정일을 지칭한 건 아니지만 두 차례나 ‘선임자’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당시 핵심 관계자들의 대남 정책을 비판한 것이다.
김 위원장이 선대의 결정까지 비난하고 나선 것은 문재인 정부가 금강산 관광 재개에 소극적인 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대북제재를 유지하며 관광 사업 재개에 따른 달러 유입을 막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에는 “북한엔 자력갱생의 길도 있다”며 더 ‘새로운 계산법’을 내보이라는 것이다. 고명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사일 발사 같은 물리적 도발은 많이 했으니 남북 경협 중단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평가했다.
북한이 향후 관광이 재개됐을 때 더 큰 수익을 챙기기 위해 사전 정지작업에 나섰다는 해석도 나온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과의 협상이 잘되면 결국 금강산 관광이 재개될 텐데 이런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남한과 나눌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북한이 중국 기업을 들여와 개성공단의 직접 운영에도 나설 수 있다”고 전망했다.
○ 南 투자한 8268억 원 날릴 판
금강산 관광사업에 현대아산은 사업권 대가와 시설 투자를 합해 모두 7670억 원을 투자했고 정부는 598억6000만 원을 지원해 총 8268억6000만 원이 투입됐다. 이런 남한 자본이 북한에 넘어가게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정부는 북한의 남측 시설 철거가 발표된 23일 공개 항의를 하지 않았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한반도비핵화대책특위 간담회에서 김 위원장이 “너절한” “피해지역 가림막, 격리병동” 등으로 표현한 남측 시설에 대해 “우리 시설은 이미 10년 정도 경과하는 과정에서 낡은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고 민주당 김한정 의원이 전했다.
논란이 되자 통일부는 9시간여 뒤 자료를 내 “(김 장관이 간담회에서) 북한의 의도를 분석하거나 평가하는 취지의 발언을 한 사실이 없다”고 해명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