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사태’가 일깨운 ‘불평등’이라는 화두

  • 주간동아
  • 입력 2019년 10월 26일 09시 55분


[원포인트 시사 레슨]
조국이라는 손가락만 보지 말고 ‘조국 사태’가 가리키는 달을 보자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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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조국 법무부 장관이 물러났고 그의 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가 구속됐다. 야당은 환호했고 여당은 낙담했다. 조 전 장관을 반대한 반조(反曺)는 당연지사라며 한숨을 돌렸고, 조 전 장관을 지지한 친조(親曺)는 분루(憤淚)를 삼키며 호곡했다.

그걸로 끝일까. 8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하고 조 전 장관의 사표가 수리된 10월 14일까지 두 달 넘게 치른 국가적 홍역이 고작 비선출직 공무원의 사표 한 장으로 끝나도 되는 걸까. 검찰 수사를 받는 조 전 장관 가족 혹은 조 전 장관에 대한 사법 처리 여부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조 전 장관의 출중한 외모에 빗대어 ‘21세기형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 표현하는 것 역시 사태의 본질을 개인적 자질의 문제로 치환하는 감이 없지 않다.

조 전 장관 사퇴 이후 가을 정국을 놓고 ‘문재인의 시간’이니 ‘윤석열의 시간’이니 하는 것 역시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는 일이다. 이 가을은 조국 사태의 본질에 대해 한국 사회의 깊은 성찰이 절실한 시간이다.

오동잎 한 장에서 가을을 읽자

[사진 제공 · 민음사]
[사진 제공 · 민음사]

오동잎 한 장을 보고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안다고 노래한 시인이 누구였던가. 어쩌면 조국이라는 일개인은 그 오동잎 한 장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를 통해 자신의 도래를 알리는 가을의 정체는 뭘까. 남에겐 서릿바람 같고 나에겐 봄바람 같은 ‘내로남불’이라는 이름의 신기루? 외세와 언론을 먹잇감 삼아 거악에 맞서는 영웅으로 포장하는 포퓰리즘이라는 이름의 불가사리? ‘살아 있는 권력’도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무소불위 힘을 자랑하는 검찰이라는 이름의 리바이어던?

현실이 난마처럼 얽혀 있을 땐 서책을 펼치라고 선현은 말씀하셨다. 이번 사태를 예감이라도 한 듯이 8월 9일 직후 출간된 책 2권이 있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의 ‘불평등의 세대’와 리처드 리브스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의 ‘20 vs 80의 사회’다. 두 책을 읽다 보면 조국이라는 일각(一角) 아래 잠겨 있는 거대한 빙산(氷山)이 엿보인다. 바로 조 전 장관이 젊은 시절 해결하고 싶어 열병을 앓았다던 불평등의 문제며 계급의 문제다.

이 문제가 결코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님을 확인하고자 ‘20 vs 80의 사회’를 먼저 펼쳐보자. 저자 리브스는 영국 중하층 출신으로 옥스퍼드대를 나온 ‘개룡남’이다. 아무리 개룡남이라 해도 계급사회인 영국이 지긋지긋해 2016년 아내의 나라인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미국이야말로 평등지향적인 나라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미국 사회의 속살을 들여다보니 실상은 영국 못지않은 계급사회더란다. 영국보다 더 나쁜 것은 그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집단적 위선에 사로잡힌 나라라는 점이다. 여기서부터 느낌 팍 오지 않는가.

리브스가 이런 미국 사회에 감춰진 위선을 엑스레이 사진처럼 찍어 제시한 증거가 버락 오바마 정부 때 추진한 ‘529 대학 저축 플랜’(529플랜) 폐지 법안에 대한 민주당 의원과 후원자들의 반발이다. 529플랜은 자녀의 대학 학자금 마련을 위한 장기저축상품으로 짭짤한 세금 혜택이 주어진다. 문제는 이 혜택을 누리는 사람의 90%가 소득 기준 상위 25%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혜택을 줄이는 대신 저소득층 학생을 위한 세제 혜택을 강화하겠다고 했다가 민주당 내부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자칭 진보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 포기엔 쌍심지를 켜며 달려든 것이다.

‘1 대 99’ vs ‘20 대 80’

리브스는 미국 진보진영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다. 그런 그가 미국 사회의 문제는 ‘1 대 99’가 아니라 ‘20 대 80’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내부고발’이자 ‘양심선언’이다.

‘1 대 99’는 신자유주의로 득세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같은 1%의 슈퍼리치를 저격하는 효과를 낳는다. 반면 ‘20 대 80’은 진보, 보수에 상관없이 미국 엘리트 전반과 거기에 들지 못하는 서민의 문제로 전환시킨다. 한국으로 치면 재벌과 정치인 같은 특권층에 속한 ‘그들’이 아니라, 의사·변호사 같은 전문직, 대기업 정규직, 교수와 연구원, 기자 같은 ‘우리’가 문제인 것이다. ‘주 상류층인 우리는 심화되는 불평등의 피해자가 아니다. 우리는 수혜자다.’


리브스는 이를 뒷받침하는 통계를 쭉 제시한다. 최상위 1%가 미국 전체 부의 37%를 소유하지만 그 바로 아래 ‘중상류층’에 해당하는 19%는 그 절반 이상을 갖고 있다(그래프1 참조). 둘을 합친 20%가 부의 90% 가까이를 소유하고 나머지 80%가 10여%를 나눠 갖는 셈이다. 소득 역시 1983~2013년 상위 20%가 83% 증가한 반면, 나머지 80%는 미미하게 늘거나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문제는 그 경계가 상위 20%와 그 아래 80%로 뚜렷이 구별되며 그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진다는 데 있다. 그래서 그 경계를 ‘대격차’라 부른다.


역사적으로 미국 사회에서 교육은 ‘평등을 일구는 가장 위대한 기제’로 찬양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불평등의 악순환을 낳는 컨베이어벨트가 됐다. 미국 최고 명문대 학생 중 3분의 2가 소득 상위 20% 가구 출신이다(그래프2 참조). 부모가 명문대 출신인 경우 자녀에게도 같은 대학에 입학 특혜를 주는 미국의 독특한 레거시 제도 때문만이 아니다. 능력본위(meritocracy) 선발 절차 자체가 돈 많은 집 아이에게 훨씬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학자 시걸 엘론에 따르면 능력본위 선발 기준(SAT 점수나 내신)에 맞추려는 학부모와 학생들의 노력이 1980년대 중반 이후 고등교육에서 계층 분화를 악화시킨 주된 요소다.

불평등의 생산자이자 수혜자, 386

[사진 제공 · 문학과지성사,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사진 제공 · 문학과지성사,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교육만이 아니다. 미국 사회에서 구인자들이 직원을 뽑을 때 가장 중요시한다는 인턴 경험 기회는 중상류층 자녀들에게 불공정하게 돌아간다. 리브스는 좋은 학교가 있는 동네에 사는 것, 능력본위를 강조하는 대학 입시, 인턴 기회의 불공정한 배분 등 3가지를 합쳐 ‘기회의 사재기’라고 불렀다. 상위 20%는 이 기회의 사재기를 통해 부와 권력을 대물림하면서도 이를 자녀의 머리와 재능, 노력의 대가라고 주장한다. 많은 이에게 막장드라마로 비쳤던 ‘SKY 캐슬’이 리얼리티 만점의 드라마임을 재확인시켜준다. 그런 중상류층 가구의 자녀들을 향한 멋진 일갈도 등장한다. “삼루에서 태어났으면서 자기가 삼루타를 친 줄 안다.”

‘20 vs 80의 사회’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불평등 문제를 건드렸다면 ‘불평등의 세대’는 한국의 불평등 문제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문제의식은 매우 닮아 있다. 산업화 세대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화한 신자유주의 못지않게 그것에 대한 저항을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한 민주화 세대에게도 책임이 있는 건 아닐까. 민주화운동 참여를 훈장처럼 자랑하는 그들이 지금 한국 사회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는데 한국 사회는 왜 여전히 입시지옥, 취업지옥, 차별지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민주주의의 완성’과 ‘불평등의 심화’는 왜 공존하는 걸까.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에서 불평등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관련 문제 연구로 정평이 난 시카고대 사회학과 교수를 거친 이철승(48) 교수의 답은 이거다. 학창 시절 민주주의와 평등을 외치던 386세대가 특유의 정치 네트워크 조직화의 경험을 살려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를 장악해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차례로 접수한 후 불평등의 생산자이자 수혜자로 등극했다. 다시 말해 산업화 세대에 전면으로 저항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조직력과 투쟁력을 바탕으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산업화 세대가 대거 퇴장하는 권력 공백기에 대기업과 정치권을 장악한 뒤 초심을 잃고 자신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골몰하면서 아랫세대에게 고통의 짐을 떠넘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를 뒷받침할 많은 통계자료를 제시한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현 386세대에 해당하는 50대와 60대 당선인 구성비가 83%로 산업화 세대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96년 15대 총선의 73%를 10%p나 추월했다(그래프3 참조). 정치신인에 해당하는 40대 당선인 점유율은 17%로 지난 20년간 최하위로 조사됐다.


대기업 이사 점유율에서도 386세대는 70%를 넘어선다. 산업화 세대의 최고 점유율이던 62%를 압도하는 수치다(그래프4 참조). 반면 1970년대 전반(1970~74) 출생자들은 9.4%에 머물고 있는데, 이는 386세대 전반(1960~64) 출생자들이 40대 중후반이었을 때 비율이 25%인 것에 비하면 절반에도 못 미친다. 또 전체 소득 점유율을 각 출생 세대의 인구 점유율로 나눈 ‘상대평균소득비’를 보면 386세대는 이전 세대를 능가하는 상승세를 보이고, 그 아래 세대도 압도하고 있다.

한국처럼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50, 60대가 부와 권력의 정점에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 교수의 비판은 386세대의 경우 외환위기로 그 윗세대가 일찍 물러난 자리를 운 좋게 차지해 장기집권하고 있으면서도 물러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뿐 아니라 정규직은 물론, 부동산과 교육 관련 정보 등 기득권의 수혜를 만끽하면서도 왕년의 민주화운동 주역이라는 명예까지 탐한다는 비판이다. 그래서 불평등의 생산자이자 수혜자인 것이다.

조국을 묵살하면 트럼프가 온다

‘20 vs 80의 사회’에서 말하는 20%에 386세대가 대거 포진해 있다는 것이 ‘불평등의 세대’의 착안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조국으로 대표되는 386세대는 이를 인정하고 수용할 마음의 자세가 돼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조국은 386세대가 젊은 시절 가졌던 순수함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그런데 그와 그 가족이 알게 모르게 특권을 누리고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면 그들의 청춘마저 더러워진다고 생각한다. 그걸 참을 수 없어 거리로 나와 무수한 문제가 산적해 있는 대한민국에서 유독 ‘검찰개혁’이 최우선 과제라고 목청을 높이는 것이다.

하지만 조국 사태는 조국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로 인해 대표되는 386세대, 아니 한국 사회를 이끌고 있는 엘리트 계층 전체의 문제다. 외세와 결탁하고 언론을 마사지하는 소수의 재벌과 특권층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맹렬히 비판하는 척하면서 실제론 그 체제가 주는 혜택을 마치 마지못해 누리고 사는 듯한 윤리적 위선이 문제다. 짐짓 이를 모른 채 무시하고 살아갔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까. 20%, 아니 정확히는 최상위 1%엔 못 끼지만 그것에 버금가게 호의호식하는 19%에 대한 80%의 반감과 증오가 가공할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미국에서 그 결과가 바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었다. 리브스의 고백을 그대로 옮겨본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부자들에 대해서는 아무 유감이 없었다. 사실 그들은 부자들을 존경했다. 그들의 적은 부자가 아니라 중상류층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기자, 학자, 기술자, 경영자, 관료들. 이름에 PhD, Dr, MD 같은 알파벳이 붙는 사람들, 그러니까 당신이나 나 같은 먹물들 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거다. 조국 문제를 묵살하면 트럼프가 온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211호에 실렸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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