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사퇴로 공석이었던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판사 출신의 5선 중진인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지명한 가운데, 추 후보자의 판사 시절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6일 정치권과 법조계 등에 따르면, 추 후보자는 지난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전두환 군사정권의 횡포가 극에 달하던 1985년 봄 춘천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인천·전주지법, 광주고법을 거치며 10년간 판사로 근무했다.
추 후보자는 법관 시절 ‘까칠한 여자 판사’로 통했다고 한다. 추 후보자가 그렇게 불리게 된 사연은 그의 ‘소신 판결’ 때문이었다.
1986년 검찰은 불온서적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전국의 서점에 대한 압수수색 시행에 들어갔다. 검찰이 작성한 불온서적 리스트엔 조세희 작가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 등이 포함됐다.
당시 전국 법원에는 검찰로부터 일제히 같은 내용의 압수수색 영장이 접수됐다. 다른 법원에서는 검찰이 청구한대로 압수수색 영장이 다 발부됐지만, 유일하게 춘천지방법원에서 춘천의 한 대형서점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만 기각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런 일을 벌인 주인공은 바로 2년차 판사였던 추 후보자였다.
당시 막내 판사였던 추 후보자는 검찰이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을 받았다. 영장 청구서에 기재된 죄명은 경범죄처벌법상 ‘유언비어 유포’였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없이 책 100권의 목록만 나열된 채였다. ‘현대판 분서갱유’라고 판단한 추 후보자는 그런 영장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아 영장을 기각했다.
“국민의 알 권리는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인데, 경범죄처벌법에도 이법을 남용해 기본권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남용 금지 조항이 있다. 영장 청구서에는 어떤 것이 혐의가 있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고, 책을 유언비어라고 볼 근거자료도 없다”는 게 추 후보자가 영장을 기각한 논리였다.
또 다른 일도 있었다. 1987년 1월 민주화 운동을 하던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아 사망한 사건이 일어난 비슷한 시기 추 후보자도 시국 사건에 관한 즉결 재판을 맡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민사소송법 책을 집필한 유명 학자였던 법원장이 추 후보자를 법원장실로 불렀고, “수사기관에서 부탁을 받았는데, 이런 학생은 법정 최고의 구류형 29일을 선고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법원장은 자신이 추 후보자의 은사라는 점을 내세우며 “추 판사도 살고 나도 삽시다”라고 하기까지 했다.
은사인 법원장의 부탁에도 추 후보자는 아무 말 없이 법원장실을 나왔다고 한다. 당시 재판정에서 점퍼 차림의 남자 3명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게 수상해 따져 물으니 ‘정보과 형사’라고 하자 추 후보자는 “지금 판사의 재판을 메모하러 왔느냐. 당장 나가세요!”라고 호통을 쳤다. 추 후보자는 정보과 형사들을 내쫓고 난 뒤 불법집회를 한 학생에게 ‘구류 3일’만 선고했다.
한 번은 시위를 주도한 일로 수배된 강원대생 3명이 잡혀 영장이 청구됐다. 추 후보자는 군 입대 영장 발부로 병역법 위반까지 걸려 있는 한 학생만 영장을 발부하고, 나머지 두 학생은 “시위 정도나 수법을 볼 때 그다지 죄질이 무겁지 않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그러자 다음날 새벽 2시 경찰서장이 전화를 걸어와 “기각한 영장을 갖다 줄테니 다시 영장을 발부해 달라. 정보과 형사들이 잡으려고 며칠밤을 새웠는데 판사라고 제멋대로 영장을 기각하느냐”라고 항의했다. 이에 ‘까칠한’ 추 후보자는 물러서지 않고 “판사가 한번 서명한 영장은 다시 번복할 수가 없다. 그리고 영장 청구권자가 검사인데 경찰서장이 왜 제게 직접 전화를 하느냐. 검사의 지휘를 받으시는 것이 좋겠다”고 일침을 가했다.
다음 날 법원장이 추 후보자를 불러 “아버지 같은 경찰서장에게 도대체 뭐라 했길래 서장이 그리 화가 난 것이냐”라고 질책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던 추 후보자는 검찰 측에 문제를 제기했고, 결국 경찰서장이 찾아와 추 후보자에게 사과를 하면서 마무리됐다고 한다.
추 후보자가 인천지방법원에서 근무하던 1990년엔 영장실질심사를 맡게 됐다. 당시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을 규탄하는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들에 대한 구속영장이 날아왔지만, “국민의 신임을 받던 정치 지도자가 자신이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세력과 손을 잡고 국민을 배반했다면, 국민의 분노를 감수해야 하며 분노한 국민의 입을 법으로 막아선 안 된다”고 생각한 추 후보자는 구속영장을 전부 기각했다. 이는 추 후보자에게 “정치가 잘못되면 사법정의를 지킬 수 없다”는 생각이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추 후보자가 ‘의리의 추 판사’로 불리게 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됐고, 야당은 새로 대법원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대법원장 이하 대법관의 전면적인 교체를 주장했다. 이에 발맞춰 서울에서 일부 판사들이 대법원장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지방의 젊은 법관들도 서명 운동에 동참하고 나섰다.
하지만 “지금 누가 누구더라 나가라 마라 할 자격이 있느냐”라고 생각한 추 후보자는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사법 정의를 지키지 못해 국민 불신을 초래한 사태에 모두가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남 탓으로만 돌리는 듯한 집단행동엔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법집단이 시대적 사명과 양심을 외면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반성해야 사법 정의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게 추 후보자의 생각이었다. 추 후보자가 서명을 하지 않자 당시 법원장은 매우 흡족해 하며 추 후보자를 ‘의리의 추 판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추 후보자는 1995년 정계 입문 후 판사 시절을 돌아보며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라고 했다. 그는 “시대가 부정하여 제가 했던 판사로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했던 행동을 한 것이 마치 영웅이 된 것 마냥 떠도는 것뿐”이라며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다닐 만큼 자랑스러운 기억이 아니다”라고 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