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간 날 선 ‘말의 전쟁’이 격화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8일(현지 시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lose everything)”고 대북 경고장을 날리자 하루도 안 돼 김영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은 “우리는 잃을 게 없다”며 받아쳤다. 북한 외교의 원로 격인 리수용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이날 담화를 내고 “트럼프는 더 큰 재앙적 후과를 보기 싫거든 숙고하라”며 엄포를 놨다. 2년 전 북한과 미국이 말폭탄을 주고받던 ‘화염과 분노’ 시절로 되돌아가는 모습에 북-미관계의 안전핀과도 같았던 정상 간 신뢰마저 위태로운 모습이다.
○ 대미 강경파 김영철 “트럼프는 경솔한 늙은이”
김영철은 9일 오후 담화에서 “또다시 ‘망령 든 늙다리’로 부르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다시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참을성 잃은 늙은이’ ‘경솔하고 잘망스러운 늙은이’라는 원색적인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5시간도 채 안 돼 리수용까지 담화를 내고 “국무위원장의 심기를 점점 불편하게 할 수도 있는 트럼프의 막말이 중단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2월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에도 북한은 꼬박꼬박 미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써왔지만, 이날은 직함을 생략한 채 ‘트럼프’라고만 칭했다.
군 출신 김영철과 외교통 리수용은 모두 김정은 위원장이 언제든 트럼프를 겨냥할 수 있다고도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신뢰관계가 언제든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영철이 먼저 “국무위원장은 아직까지 그 어떤 자극적 표현도 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나는 트럼프에 대한 우리 국무위원장의 인식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리수용 역시 “얼마 안 있어 년말(연말)에 내리게 될 우리의 최종 판단과 결심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하게 되며 국무위원장은 아직까지 그 어떤 립장(입장)도 밝히지 않은 상태에 있다”고 강조했다.
북-미 간 거센 맞대응이 지속된다면 외형적으로 유지돼온 두 정상의 ‘브로맨스’가 깨지는 건 시간문제라는 전망이 나온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미주연구부장은 “북-미 간의 만남이 없다면 지금과 같은 갈등 국면은 고조될 수밖에 없다. 계속 말폭탄을 주고받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제재 해제 등을 안 해 주면 북한은 위성을 가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美 “북한에 많은 대응 수단 있다”
미국의 대북 경고 수위도 점점 올라가고 있다.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8일(현지 시간) CBS방송 인터뷰에서 북한의 핵실험 가능성과 관련해 “우리에게는 (대응할) 많은 수단이 있다”고 했다. 사흘 전만 해도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북한이 협상 테이블에 나오기를 희망한다”고 했지만 북한의 ICBM 관련 움직임에 발언 수위를 확 끌어올린 것이다. 다만 그는 스티븐 비건 국무부 부장관 지명자가 곧 한국 등을 방문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우리는 협상을 계속하고 있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워싱턴 외교 소식통은 “북한과 관련한 상황을 국무부나 국방부 같은 관계부처가 아니라 백악관이 직접 다루기 시작했다”며 “그만큼 트럼프 행정부가 현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반면 청와대는 ‘로키(low-key)’ 대응을 이어가고 있다. 청와대는 9일에도 북한의 동창리 시험에 대해 아무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북-미 간 비핵화 의견 차가 큰 상황에서 대화 동력을 견인할 별다른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커녕 (북한의 중대한 시험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대응도 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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