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정 이어 靑까지 비판 가세…美 대사 공개 비판 이례적
평양선언 이후 美 '속도 조절론'…멈췄던 남북관계 '자성'
제재 면제 카드로 돌파구…美 반대에도 강행하겠단 뜻
청와대가 17일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 대사의 발언과 관련해 높은 수위로 공개 비판한 것은 남북 관계 발전 구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의 반대에 가로막혀 지난 1년의 시간을 허비한 것을 더이상 반복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날 정부의 북한 개별 관광 허용 추진 구상과 관련해 대북 제재 위반 가능성을 공개 거론한 해리스 대사와 관련해 강한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이 관계자는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해리스 대사의 전날 발언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라는 질문에 “대사가 주재국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서 언론에 공개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대단히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정부는 남북관계의 실질적 진전과 조속한 북미대화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해나갈 것”이라면서도 “남북협력과 관련된 부분은 정부가 결정할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청와대가 이처럼 직설적으로 주한미국 대사를 공개 비판한 것은 이례적이다.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 구상에 대해 미국 대사가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이 적절치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을 특정해 거론하며 적절성 여부를 평가한 해리스 대사의 태도는 주어진 권한을 한참 벗어난 무례한 행위였다는 점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겠다는 정무적 판단이 깔린 것으로 볼 수 있다.
해리스 대사는 문 대통령이 지난 7일 신년사를 통해 대북 협력 사업을 제안한 당일 KBS와의 인터뷰를 통해 남북관계 ‘속도 조절론’을 피력하며 제동을 걸었다.
또 지난 16일 외신기자 간담회에서도 “향후 제재를 유발할 수 있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한미 워킹그룹을 통해 북한과의 협력 계획을 세워야 한다”며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 구상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특히 “문 대통령의 지속적 낙관주의는 고무적이다. 그의 낙관주의가 희망을 조성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이에 따른 행동은 미국과의 협의 하에 이뤄져야 한다”고도 했다.
해리스 대사의 이러한 발언은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북미 비핵화 협상을 견인하겠다는 구상과 함께 낙관적 전망을 내놓은 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내용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외교가를 중심으로 제기됐다.
나아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들을 관저로 사실상 ‘초치(招致)’해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등 해리스 대사의 과도한 행태는 상대국과의 외교적 가교(架橋) 역할이라는 주재국 대사의 본연의 역할을 한참 벗어나 통제력을 잃은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계속돼왔다.
설훈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이날 확대간부회의에서 “해리스 대사가 제재의 잣대를 들이댄 데 대해 엄중한 유감의 뜻을 표명한다”며 “개별 관광은 제재 대상도 아니며, 내정간섭 같은 발언은 동맹 관계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송영길 의원은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대사가 무슨 조선총독인가”라면서 “대사로서 위치에 걸맞지 않는 과한 발언”이라고 직격했다.
이상민 통일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대북정책은 대한민국의 주권에 해당된다”며 해리스 대사의 발언이 주권침해에 해당한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지적했다.
여당과 통일부에 이어 청와대까지 해리스 대사의 공개 비판에 가세한 것은 그만큼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지난 1년간 남북협력에서 더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며 5가지 대북협력 사업을 제안한 바 있다.
▲남북 철도도로 연결 ▲남북 접경지역 협력 ▲2032년 올림픽 남북 공동개최 ▲비무장지대(DMZ)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동 등재 ▲김정은 국무위원장 답방 등 5가지가 문 대통령이 제안한 대표적인 남북협력 사업이다.
이러한 남북협력 사업들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에 직간접적으로 묶여 있어 즉각적인 추진이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20가지의 제재 면제 조항을 적절히 활용하면 충분히 추진 가능하다는 게 정부 입장이다.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은 전날 CBS 라디오 ‘정관용의 시사자키’에 출연해 유엔 제재와 미국의 독자 제재를 언급하며 “(그 중에는) 상당한 부분을 제재 면제받은 것도 있다”며 “대북 제재도 면제 사유가 있는데, 그 사유에 해당하는 것에 대해서 올해 미국과 적극적으로 면제에 대한 협상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그 중에서 금강산 관광을 포함한 북한 전 지역을 대상으로 한 개별 관광을 제재와 무관하게 당장 추진할 수 있는 사업으로 보고 있다.
노 실장은 “개별 방문은 사실 유엔 대북제재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건 언제든지 이행할 수 있는 부분”이라며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 번 검토해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올해 들어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고 있는 데에는 지난 1년 간 미국의 반대에 가로막혀 허송세월을 보냈다는 자성의 인식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북미 대화의 교착속에서 남북 관계의 후퇴까지 염려되는 지금 북미대화의 성공을 위해 노력해 나가는 것과 함께 남북 협력을 더욱 증진시켜 나갈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고 언급한 것도 이러한 인식의 토대 위에 있다.
문 대통령이 2018년 9·19 평양 공동선언을 토대로 ‘조건부 제재 완화론’에 대한 공론화를 국제사회에 시도했다가 미국의 반대에 가로막혀 뜻을 접었고, ‘한미 워킹그룹’이라는 족쇄에 발목 잡혀 남북관계마저 후퇴하게 됐다는 게 외교가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두 바퀴 축을 이뤄 선순환을 이루며 굴러갈 때 진정한 의미의 한반도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는 문 대통령의 ‘두 바퀴 평화론’도 사사건건 제동을 거는 미국 앞에서 무력화 됐다는 청와대 내부의 성찰도 적지 않았다.
북미 비핵화 협상의 동력을 불어넣을 남북관계마저 멈춰서자 ‘하노이 노딜’ 이후 계속된 장기 교착 상태를 풀만한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이 “북미대화가 성공하면 남북협력의 문이 더 빠르게 더 활짝 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언급한 데에서 판단 착오였다는 인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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