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그룹이 함께 사업할 만한 아이디어를 제출해 달라고 정부가 강하게 요구하고 있지만 마땅한 아이디어가 없다. 기업마다 중장기 사업의 방향, 핵심 기술이 다른데 ‘협업하라’는 건 말이 안 된다.”
5대 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21일 정부의 ‘공동 사업화’ 추진 계획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정부가 협업 사례로 내세운 사업이 전기차배터리, 인공지능(AI) 등 각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사업이다. 단순히 규모가 큰 5대 기업이란 이유로 강제 ‘동맹’을 맺는다 한들 협업이 되겠는가”라고 했다.
5대 그룹은 모두 ‘중장기 재계 공동 사업화 프로젝트’ 등의 이름을 붙여 최고경영진에 정부의 요구를 보고한 상태다. 한 그룹은 지난주 전체 계열사에 방안을 찾으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현 정부는 반시장정책이 절대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기업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법은 늘고, 이제는 기업의 미래 성장 계획까지 간섭하기 시작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이날 이른바 ‘공정경제 3법’(상법, 자본시장법, 국민연금법) 시행령 개정안이 국무회의에서 가결되자 재계에선 “해도 너무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등 주요 경제단체들이 수차례 ‘경영권에 대한 과도한 간섭’이라며 반대했지만 요구는 반영되지 않았다.
이날 가결된 3개 시행령은 기업의 최고의결기구인 이사회를 규제하기 위한 제도들이다. 상법 시행령에서는 사외이사의 임기를 6년, 계열사까지 포함해도 최대 9년으로 제한한다. 한국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566개 기업들이 당장 3월 주주총회부터 718명의 새 사외이사를 찾아야 한다. 한 상장사 관계자는 “교수, 관료 등 한정된 풀 안에서 적임자를 찾기 위해 벌써부터 경쟁이 치열하다”며 “우리 회사 기밀을 다뤘던 사외이사가 경쟁사로 갈지를 신경 쓰는 건 지금은 사치”라고 말했다.
자본시장법 시행령은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들이 경영권에 간섭하기 쉽게 했다.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투자자들이 경영 참여를 선언하지 않아도 상장사에 대해 정관 변경을 추진하거나 일부 임원의 해임을 손쉽게 요구할 수 있게 됐다. 기존에는 5% 이상 지분을 가진 투자자가 정관 변경 등을 요구하려면 경영 참여로 간주돼 금융당국에 보고하고 공시도 해야 했다. 재계는 정부 입김이 강한 국민연금이 행동에 나설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지난해 12월 의결된 국민연금 주주권행사 가이드라인으로 이미 국민연금은 기업에 이사 해임 등을 쉽게 요구할 수 있다. 지난해 말 기준 국민연금이 국내 상장사 중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302개사, 10%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99개사다.
이처럼 논란이 커지자 정부는 국민연금법 시행령을 통해 국민연금의 전문성을 강화하도록 기금운용위를 보좌할 전문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하지만 재계는 국민연금 내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기금운용위 위원장이 보건복지부 장관이어서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 여기다 지난해 11월 시행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시행령 개정안은 5억 원 이상 배임과 횡령 유죄가 확정되면 총수라도 복직을 제한한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 스스로 지배구조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며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해야 할 기업들이 경영권 방어에 무의미하게 힘을 쏟게 생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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