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 이용희 선생은 한국의 1세대 국제정치학자이자 오늘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만든 분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교수들 대부분 이용희 선생의 직계 제자이거나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학계뿐만이 아니라 관계에도 동주 선생의 제자들이 다수 있다. 그리고 현재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학생들도 사실 알게 모르게 동주 선생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쯤 되면 동주 선생은 한국 국제정치학계의 대부(大父)라고 할 만 하다. 그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한국 국제정치학계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그가 작고한지 23년 가까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하다. 그가 이 정도의 영향력을 갖게 된 이유는 뭘까?
동주 선생은 일제 시기 누구보다도 빨리 국제정치학이라는 ‘신학문’을 받아들였다. 이는 그가 한국 국제정치학계의 대부가 된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이것뿐이었다면 그는 오늘날까지 회자될 정도의 영향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한국 국제정치학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된 가장 주된 이유는 그의 학문적 성과와 지향에 있다. 동주 선생이 내놓은 학문적 성과로는 ‘권역’과 ‘전파’의 개념이 있다. 특히 그가 내놓은 권역이론은 영국의 국제사회학파 이론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에 시기적으로 앞선다는 평가까지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가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동주 선생의 학문이 갖는 ‘지향성’에 있다고 본다.
선생은 세상에 가치중립적인 지식은 없다고 보았다. 때문에 서구의 국제정치학 이론은 특정 국가들의 국익과 무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령, 국제정치학 이론에서는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을 통한 현상유지를 강조하는데 이는 기득권 국가의 이해와는 잘 맞지만 당시 한국과 같은 식민지 국가들의 이해와는 맞지 않았다. 그들 입장에서야 세력균형으로 현상을 유지해야 자국의 식민지를 유지할 수 있겠지만 한국 같은 식민지 국가들 입장에서 현상유지는 식민지 기간의 장기화 내지 영속화에 지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선생이 내세운 게 ‘장소의 논리’다. 각 지역에는 각 지역의 현실과 사정이 있고 때문에 각국이 추구하는 국제정치학은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주 선생은 ‘한국적 국제정치학’의 성립을 열망했다. 한국적 국제정치학에 대한 열망의 저변에는 식민지 조국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다. 내겐 동주 선생의 문제의식이 크게 와 닿았다. 그가 내세운 ‘장소의 논리’, ‘한국적 국제정치학에 대한 열망’은 내가 북한학을 ‘국적 있는 연구’라고 생각했던 것과 유사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북한학을 보완하기 위해 국제정치학을 공부했지만 동주 선생의 사상을 보니 오히려 북한학이 국제정치학을 보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북한학과 국제정치학은 상호보완적이다. 국제정치학을 공부함으로써 ① 북한 정세를 넘어선 거시적인 세계정세 차원에서 한반도 문제를 볼 수 있고, ② 북한학에 부족한 현상을 분석하는 ‘이론적 틀’을 제공받을 수 있다. 반대로 북한학을 공부함으로써 ① 한반도만의 특수 현상을 알 수 있고 ② 이로써 국제정치학 이론이 한반도 정세에 맞는지 비판적으로 분별할 수 있다.
북한학이라는 ‘국적 있는 연구’와 ‘이론적 틀’인 국제정치학이 결합될 때 또 다른 ‘한국적 국제정치학’의 모색이 가능하다. 다만 동주의 한국적 국제정치학이 식민지 조국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면 내가 추구하는 한국적 국제정치학은 분단국 조국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 요컨대, 내가 지향하는 한국적 국제정치학은 ‘통일을 위한 한국적 국제정치학’이다.
한국의 국익은 궁극적으로 현상유지에 있지 않다. 현상변경에 있다. 그리고 그 현상변경은 한국 주도의 통일이다. 내가 추구하는 한국적 국제정치학은 기존의 국제정치학을 우리의 현실에 맞게 ‘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변용·대체해 실용성을 극대화한 학문이자 한국 주도의 통일을 위한 전략의 기반이다.
국제정치학은 사회과학이다. 자연과학이 아니다. 자연과학에서의 이론과 지식은 패러다임이 변하지 않는 한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도 않는다. 1+1은 언제 어디서나 2인 것처럼 말이다. 사회과학은 다르다. 사회과학 이론의 적합성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가령, 유럽연합의 이론적 기반이 된 (신)기능주의 이론이나 다자안보체제는 현 동북아시아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국제정치학 이론을 배우는 건 분명 중요하지만 이론을 배우기에 앞서 우리가 처한 현실을 알아야 한다. 그럼 다른 지역과는 다른 우리만의 문제는 뭘까? 분단이다. 분단은 통일로 극복될 수 있다. 어떤 방식의 통일이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통일의 대상인 북한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내게 북한학은 ‘국적 있는 연구’였다.
내게 있어 북한학은 또 ‘시대의 연구’이기도 하다. 한국이 국제정치에서 합리적 행위자라면 결국 통일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통일편익은 통일비용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가령, 북한의 핵 위협이 사라지고 한국이 대륙과 연결되면서 생길 경제권 확대와 수송비 절감 효과는 영구적이다. 남북 간 경제격차에 따른 세수증대는 북한 지역이 경제성장을 하면 해결된다. 당장 들어갈 막대한 통일비용을 어떻게 줄일 것이고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가 문제일 뿐이다. 확실한 건 두 가지다. 통일은 궁극적으로 이익이라는 점과 통일비용을 최소화하는 건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물론 미래는 모른다. 세대가 지날수록 통일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통일의 효용을 부정하더라도 북한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는 남는다. 우리에게 선택지는 두 가지다. 북한과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갈 것인지 아니면 계속 반목하는 관계로 갈 것인가이다. 여기서는 선택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겠다. 중요한 건 어떤 관계로 가든 기본적으로 ‘북한을 알아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현실은 남북한 정치에 ‘적대적 공생관계’를 만들어왔다. 남북의 정권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적으로서의 서로의 존재를 이용해 내부를 결집시키고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기형적 관계’를 의미한다. 북한의 삼대세습 정권, 남한의 역대 군부정권은 어떤 의미에서는 분단구조의 파생물이라 봐도 무방하다.
이러한 상황은 내 마음 속 사명감의 원천이다. 분단과 북한의 위협 그리고 적대적 공생관계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북한의 위협을 영구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남북한 정치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종식시켜야 한다. 이를 보장할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한국 주도의 통일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북한학을 공부하는 진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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