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1980년대 말, 중국의 개혁개방에 이은 동구권 몰락, 소련 붕괴에 따른 냉전 해체, 한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에서 기인한 남북 간 현격한 재래식 무기 격차로 인해 체제 유지 차원에서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힘쓰기 시작했다.
북한은 1993년 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 거부 등 이른바 ‘벼랑 끝 외교’를 구사하면서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면서 이 무렵부터 핵개발 이유는 미국의 “대조선(북한) 적대시 정책 때문”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따라서 핵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선 자신들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폐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남북 관계가 첨예하게 갈등을 빚을 때는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대한 남측의 추종 탓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은 2003년 8월 6자회담 때 자국은 비핵화 원칙을 견지하고 있지만, 미국이 적대시정책을 취하고 있어 자위적인 정당방위 수단으로 핵 억제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 북미 외교관계 수립, 경제봉쇄 해제를 요구했다.
이 같은 주장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2017년 7월 5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 시험 발사 직후 “미국의 대 조선 적대시 정책과 핵 위협이 근원적으로 청산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핵과 탄도 로케트를 협상탁(테이블)에 올려놓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약 3개월 전인 2018년 1월 김정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남조선 당국은 온 겨레의 통일지향에 역행해 미국의 대 조선 적대시 정책을 추종함으로써 정세를 험악한 지경에 몰아넣었다”고 지적했다.
북한이 적대시 정책 철폐를 촉구하며 그동안 요구한 내용들은 군사적으로 정전 상태 종식 및 평화협정 체결, 정치적으로 주권국가로의 인정 및 북미관계 정상화, 경제적으로 제재 해제 및 자력갱생 여건 마련 등으로 무척 광범위하다.
북미 간 대화가 2018년 시작되면서부터는 적대시 정책이란 표현은 북한 매체에서 사용 빈도가 크게 줄었다. 다만,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나온 센토사 합의에서 1번(관계개선)과 2번(평화체제 구축) 항은 적대 정책 철회 방안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지난해 ‘하노이 노딜’ 이후 북한의 적대시 정책 철폐 요구는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 4월 시정연설에서 “미국의 시대착오적인 오만과 적대시정책을 근원적으로 청산하지 않고서는 북남관계에서의 진전이나 평화번영의 그 어떤 결실도 기대할수 없다”고 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해 자체 설정한 ‘연말 협상 시한’을 앞두고서 이 같은 요구가 쏟아졌다. 최룡해 북한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영철 당 부위원장, 김계관 외무성 고문, 김명길 외무성 순회대사 등은 담화를 통해 적대시 정책 철폐를 일제히 촉구했다.
이어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 말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미국이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끝까지 추구한다면 조선반도 비핵화는 영원히 없을 것”이라면서 “새로운 전략무기를 목격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이 미국에 대한 요구로 ‘대북 정책시 정책’ 철폐를 요구하는 것은 ‘전략적 모호성’에 따른 것으로 보여진다. 북한으로선 미국이 취하는 어떤 조치도 이 같은 정책에 포함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가장 원하는 것, 가장 아픈 부분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
게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대량살상무기 조정관은 지난해 11월 ‘미국의 소리(VOA)’ 방송에 ‘적대시 정책’을 명확히 규정하는 대신 일부러 모호하게 함으로써 범위를 확대하려는 게 북한의 의도라고 설명했다.
로버트 킹 전 국무부 북한인권특사는 ’적대시 정책‘ 주장은 일종의 ’지연전술(stalling tactic)‘로 이용됐다고 말했다. 비핵화 의도가 전혀 없는 북한이 비핵화 요구를 하는 미국의 어떤 행동이든 ’적대시 정책‘으로 트집 잡아 이를 일축하는데 주력해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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