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17일 5·18 민주화운동 등의 헌법 전문 수록 여부와 관련, “비록 헌법안 개헌이 좌절됐지만 앞으로 언젠가 또 개헌이 논의가 된다면 헌법 전문에서 그 취지가 반드시 되살아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8시부터 광주MBC TV를 통해 방송된 5·18 40주년 특별기획 ‘문재인 대통령의 오일팔’ 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 취임 이듬해인 2018년 3월 발의했던 개헌안을 거론, “비록 국회를 통과하지는 못했지만 제가 발의한 개헌안 전문에 5·18 민주화운동의 이념의 계승이 담겨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문 대통령이 지난 2018년 3월 발의한 개헌안의 전문(前文)은 현행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를 ‘4·19혁명’으로 적는 한편, 이 부분을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6·10항쟁의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수정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었다. 해당 개헌안은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의 전신)의 반대로 ‘표결 불성립’으로 폐기됐다.
문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지금 현재의 우리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에 의해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4·19민주운동의 이념을 계승하는 것으로만 헌법 전문에 표현돼 있다”며 “우리가 발전시켜온 민주주의가 실제로 문안화 돼서 집약돼 있는 것이 우리의 헌법인데, 4·19혁명 이후 아주 장기간, 어찌 보면 더 본격적인 군사독재가 있었기 때문에 4·19 혁명만 갖고는 민주화운동의 이념 계승을 말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것이 다시 지역적으로 강력하게 표출된 게 시기 순서로 보면 부마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이었고, 그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이 6월 민주항쟁이었다”면서 “그 미완된 부분이 다시 촛불혁명으로 표출되면서 오늘의 정부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촛불혁명은 시기상으로 아주 가깝기 때문에 정치적 논란의 소지가 있어서 아직 헌법 전문에 담는 것이 이르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5·18 민주운동과 6월 항쟁의 이념만큼은 우리가 지향하고 계승해야 될 하나의 민주 이념으로서 우리 헌법에 담아야 우리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표현되는 것”이라며 “또 그렇게 돼야만 5·18이나 6월 항쟁의 성격을 놓고 국민들 간에 동의가 이뤄지면서 국민적 통합이 이뤄질 수 있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40년 전 5·18 민주화운동 당시 비상계엄령이 확대된 5월17일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돼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돼 있다 자신을 조사하던 경찰관들로부터 소식을 접했다고 회상했다.
문 대통령은 “당시 그 경찰관들은 계엄군이 광주에 투입된 것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계엄군의 발포로 많은 광주시민들이 사상을 당한 사실, 경찰이 발포명령을 거부해서 시 진압에서 배제가 됐다는 사실, 시민군들이 예비군이나 경찰 무기고를 열어서 무기를 들고 맞서고 있다는 사실들을 저에게 경찰정보망을 통해서 올라오는 소식들을 매일 매일 전해 줬다”고 밝혔다.
이어 “저는 그런 얘기들을 들었기 때문에 그런 사실들이 당연히 다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석방되고 난 이후에 보니 그런 사실들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고, 오히려 반대로 폭도들의 폭동인 양 그렇게 왜곡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저는 광주 바깥에서는 어떻게 보면 가장 먼저 광주의 진실, 그런 것을 접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대통령께 있어 광주 시민과 오월 영령들은 어떤 존재였느냐’는 질문에 “당시 광주 오월 영령들을 비롯한 광주 시민들은 우리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상징과 같은 그런 존재”라고 답했다.
문 대통령은 “민주화의 아주 중요한 그 길목에 다시 군이 나와서 군사독재를 연장하려고 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비통한 심정이었고, 한편으로 광주 시민들이 겪는 엄청난 고통을 들으면서 굉장히 큰 죄책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특히 1980년 5월 당시 서울지역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신군부의 군 투입 빌미를 주지 않겠다며 20만명 가까이 집결한 대학생 시위대의 해산을 결정한 ‘서울역 대회군’에 대해 “나는 그 때 결정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나는 그 때 경희대 복학생 대표였는데, 나뿐만 아니라 대체로 복학생 그룹들은 ‘민주화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군과 맞서는 것이기 때문에 군이 투입되더라도 사즉생의 각오로 맞서야 한다. 그 고비를 넘어야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국제사회가 주시를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서울지역 대학생들을 상대로 아주 가혹한 진압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지금 그때 총학생회장단의 결정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매일 서울역에 모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집회를 함으로써 결국은 군이 투입되는 빌미를 만들어 주고는, 결정적인 시기에는 퇴각을 하는 결정을 내린 것 때문에 광주 시민들이 정말 외롭게 계엄군하고 맞서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 사실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고, 저뿐만 아니라 광주 지역 바깥에 있던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들 모두가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을 늘 갖고 있었고 그 부채의식이 그 이후 민주화운동을 더욱 더 확산시키고 촉진시키는 그런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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