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갈등이 신(新)냉전 구도로 격화되는 조짐을 보이면서 두 강대국 사이에 낀 한국의 ‘줄타기 외교’가 중대 기로를 맡고 있다. 정부는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며 시간벌기에 나섰지만 워싱턴 조야에선 한국을 향한 중국 견제 동참 압박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상황. 전문가들은 한미 방위비 협상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을 앞두고 한국의 외교적 선택이 자칫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정부는 22일 미중 갈등에 대한 신중한 태도를 이어갔다. 전날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기 위한 ‘경제블록 경제번영네트워크(EPN)’ 구축 방안을 한국에 제안했다고 밝힌데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이날 “미국의 구상은 검토 단계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정부에 참여 제안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정부 내에선 지난해 미국의 반(反)화웨이 전선 동참 요구를 큰 피해 없이 넘어선 사례를 거론하며 최후의 순간까지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아직 미국이 어떤 구상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확인한 단계가 아니다”라며 “당장 우리가 입장을 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한국이 감당해야 할 위기를 최소화하기 위해 시간을 벌고 있는 상황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미중이 외교 전면전을 예고하고 있는 만큼 한국에 대한 양국의 압박 수위가 어느 때보다 높아질 수 있다는 것. 실제로 미국 백악관이 21일 의회에 보고한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접근’ 보고서에선 문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한중 정상회담에서 신남방·신북방 정책과의 연계를 공식화한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을 대표적인 약탈적 경제정책으로 지목하고 한국을 포함한 7개국을 피해국으로 명시했다. 여기에 하반기 시 주석의 방한이 예상되고 있는 만큼 미중 양국의 물밑 압박을 더 이상 피해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따라 미중 갈등 격화가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과 시 주석 방한을 계기로 정부가 추진해온 중국의 ‘한한령’ 해제 등에 실질적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 특히 미국의 대중 압박 동참 요구를 거부할 경우 경제적 보복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이미 중국에 대한 보이콧은 미국 내에서 컨센서스(합의)가 이뤄진 상황”이라며 “무역이나 경제 분야에서는 훨씬 더 치열하고 치밀하게 중국을 배제하고 있어 한국 기업이 직접적으로 규제받는 건 시간문제”라고 말했다.
여권에선 문 대통령이 ‘포스트 코로나’ 전략과 독자적 남북협력 구상 역시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여권 관계자는 “미국과 비핵화 협상에 나서야 하는 북한은 미중 갈등이 고조될수록 중국에 더 의존하게 될 것”이라며 “독자적인 남북관계를 추진하려고 해도 북한이 응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일본의 수출규제 해제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협상에도 악재가 될 수 있다. 한 외교소식통은 “미국은 중국 압박을 위해 한미일 3국 공조 강화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어 한일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박효목 기자 tree6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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